돈줄 말라 ‘캐시버닝’ 한계, 이커머스 업체 줄줄이 매각설

중앙선데이

입력 2022.09.17 00:01

업데이트 2022.09.17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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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호 14면

얼어붙는 전자상거래 시장

메쉬코리아 배달 대행 서비스 ‘부릉’. [중앙포토]

메쉬코리아 배달 대행 서비스 ‘부릉’. [중앙포토]

“대표가 ‘시리즈C’(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 조달) 투자를 받기 위해 매출을 높이겠다며, 캐시버닝(의도적인 출혈경쟁) 전략을 고수했는데, 정작 투자유치에 실패했다.” 수산물 유통 플랫폼 ‘오늘회’ 운영사인 오늘식탁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이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이다. 오늘식탁은 새벽배송 서비스의 원조로 여겨지는 마켓컬리 운영사인 컬리 출신의 김재현 대표가 설립한 곳이다.

컬리와 마찬가지로 당장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이용자 수를 확보해 기업가치를 키우는 전략을 실행하던 이 회사는 지난 7월 입점 업체들에게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고, 8월 31일에는 전 직원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다. 오늘식탁은 당분간 추가 투자 유치에 나서겠지만 실패할 경우 사업을 매각한다는 방침을 주주들에게 전달한 상황이다. 유통업계에서는 누적 투자 유치 금액 170억원을 달성하며 시리즈B 단계까지 성공적으로 밟은 업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데 적잖게 놀라는 분위기다.

‘비대면’의 일상화를 가져 온 코로나19 팬데믹을 등에 업고 급성장하던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시장이 빠르게 냉각되고 있다. 이커머스 업체들의 주무기였던 ‘빠른’ 배송은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일상이 된 새벽배송 서비스의 경우 ‘레드오션’이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그렇다 보니 캐시버닝 전략도 먹히지 않고 있다. 정규진 SK증권 연구원은 “올해 4월 롯데쇼핑을 시작으로 BGF리테일과 GS리테일이 각각 5월과 7월 새벽배송 서비스 중단하는 등 이커머스 시장에선 적자 사업부를 축소하고 수익성 개선하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며 “설비 구축엔 상당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선점 업체는 많아 흑자 전환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배달 플랫폼도 이용자 줄어 역성장

유통업계에 ‘라스트마일’ 배송 시장의 혁신적인 서비스로 여겨지던 배달 플랫폼도 더 이상 캐시버닝 전략을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종료되면서 해당 분야의 이용자 수가 역성장하고 있는 탓이다. 빅데이터 분석업체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배달 플랫폼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지난 3월 3532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매월 감소해 6월 3182만명까지 떨어졌다. 여기에 1위 업체 배달의 민족(57.7%)과 2위 요기요(24.7%)가 사실상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 후위 업체가 이용자 수를 늘리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 규모 경쟁보다 손익 관리가 중요해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커머스 시장에서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매각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배달대행 플랫폼 ‘부릉’을 운영하는 메쉬코리아에 이어, 최근에는 업계 3위인 쿠팡이츠까지 매각설이 번지기도 했다. 쿠팡이츠 측에서 공식적으로 매각설을 부인하면서 일단락되긴 했지만 관련 업계에선 선두 업체 소수만이 살아남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매각 시장에 나오는 업체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영덕 디캠프(은행권청년창업재단) 상임이사는 “투자와 광고를 밀어붙여도 선발주자를 못 따라가고 있어 경기가 얼어붙기 전부터 쿠팡이츠엔 회의적인 생각이 많았다”며 “쿠팡이츠와는 별개로 이제부턴 기업들의 실적이 중요한 시점이라 살아남으려면 핵심사업에 집중해야 하고, 수익모델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매각설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새 주인을 찾은 곳도 나온다. 1세대 이커머스 플랫폼인 티몬은 지난 2일 사내 공지를 통해 큐텐이 최대주주가 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인수 방식은 사모펀드 앵커에쿼티파트너스와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등이 보유한 티몬 지분 100%를 큐텐 물류 자회사 큐익스프레스 지분과 교환하는 식이다. 기존 최대 주주들이 투자금을 회수한 것이 아니라 큐텐의 경영능력에 기대기로 한 것이다. 큐텐은 동남아시아 시장을 기반으로 한 이커머스 업체로 설립자인 구영배 대표는 G마켓(현 이베이코리아)을 미국 이베이에 매각한 인물이다. G마켓 매각 과정에서 한국 내 동종 경쟁 금지 조항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큐텐을 설립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이커머스 시장에서 새벽배송이니 로켓배송이니 하면서 혁신적인 서비스를 줄줄이 출시하며 캐시버닝 전략에 들어가자 1세대 이커머스 기업인 티몬이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새였다”며 “경기가 얼어붙는 상황이라 후위 업체를 중심으로 당분간 인수합병 등 옥석가리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커머스 업체의 옥석가리기가 어느 때보다 가혹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올 들어 한국은행이 가파르게 기준금리를 올리자 투자업계에도 자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민관협력 네트워크인 스타트업얼라이언스에 따르면 올해 7월 이커머스 업체를 비롯해 국내 스타트업들이 유치한 전체 투자금액은 8368억원으로 전년 동기(3조659억원) 대비 72.7%나 줄었다. 업체 간 경쟁이 아니더라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들은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정유신 서강대 교수(기술경영대학원장)는 “한국과 미국 등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금리를 올리자 2분기부터 스타트업 투자 자금이 말랐다”며 “업체들은 작년만 해도 주가수익비율(PER) 20배 아니면 투자를 거절하기도 하고, 미래의 비전에 투자한다며 주가꿈비율(PDR)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겨울이 찾아온 것”이라고 말했다.

“거품 꺼지면 진정한 혁신” 긍정론도

총알이 떨어진 이커머스 플랫폼이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 지는 소프트뱅크의 실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쿠팡을 비롯해 이커머스 플랫폼 투자로 유명세를 떨쳤던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 그룹은 올 2분기 30조90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올해 스타트업 신규 투자 규모를 전년 대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손해를 본 투자자들이 투자를 줄이고, 자금줄이 마른 이커머스 플랫폼 업체의 실적이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기대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장은 “국내에서도 시리즈C 단계 이상의 회사들은 규모가 커 국내 벤처캐피탈보다는 해외에서 주로 투자를 받는다”며 “이런 기업들은 조금 더 버텨서 상장하는 방법 정도가 자금을 조달할 방법인데, 말처럼 쉽지 않아 해외 자금줄이 마르면 굉장히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투자자들로부터 추가 자금조달이 어렵자 상장을 추진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이커머스 스타트업 중에선 컬리가 대표적이다. 비용이 많이 드는 새벽배송 서비스를 운영하면서도 캐시버닝 전략을 유지했던 컬리는 지난해까지 매년 영업적자를 냈다. 대신 투자를 받아 자금을 충당한 탓에 설립자인 김슬아 대표의 지분율은 5.75%까지 낮아진 상태다. 김 대표의 빈자리는 미국 세콰이어캐피탈의 중국 자회사(12.87%), 중국계 힐하우스캐피탈(11.89%), 러시아계 디지털스카이테크놀로지글로벌(10.17%) 등 외국계 투자자들이 들어오면서 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시장에 자금이 넘치던 지난해 미국 상장을 고집하면서 컬리가 상장하기 좋은 시기를 놓친 측면이 있다”며 “이제 국내 상장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증시가 얼어붙어 있어 충분한 자금을 조달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옥석가리기가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이커머스 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본다. 새로운 기술은 거품이 낄 수밖에 없는데, 이 거품이 꺼지는 과정을 거쳐야만 진정한 혁신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유신 교수는 “이커머스 플랫폼들이 그동안 고평가 받아 온 이유는 수많은 거래 사례가 쌓여 빅데이터를 활용한 서비스를 제시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며 “하지만 출혈 경쟁을 벌이는 동안 이 같은 서비스 개발이 더딘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가트너 기술혁신 곡선 에서 말하는 기대의 정점과 환멸의 단계 즉, 거품이 꺼지는 단계를 거치면 진정한 혁신 서비스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즈A~C 투자
스타트업 투자 업계에서 실리콘밸리의 관행을 빌려와 투자 단계를 알파벳으로 구분하는데, 시리즈A는 최초 투자금, 시리즈B는 상품화를 위한 자금조달, 시리즈C는 사업 확장을 위한 자금조달을 뜻한다.
캐시버닝(Cash Burning)
돈을 불태운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는 자금고갈 상태를 의미하지만, 사업 전략으로는 의도적인 출혈경쟁을 일컫는다. 매출이 늘수록 손해지만 시장을 장악하면 큰 이익을 가져갈 수 있어 유통업체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지며, 국내에선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로켓배송 서비스를 정착시킨 쿠팡이 캐시버닝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라스트마일(Last Mile) 배송
주문한 물품이 생산자를 떠나 고객에게 배송되기 바로 직전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배송을 의미하는 말. 유통자 입장에선 마지막 단계지만, 소비자들에게 첫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에 유통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 여겨진다.
가트너 기술혁신 곡선(Gartner Hype Cycle)
미국의 정보 기술 연구 및 자문 회사인 가트너에서 만든 곡선으로, 기술 성숙 과정을 기술 촉발, 기대의 정점, 환멸, 깨우침, 생산 안정 등 5단계로 나눠 시각적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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