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거품 빠지는 '보졸레 누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7면

'보졸레 누보'가 16일 전 세계에서 동시에 출시됐지만 올해는 인기가 시들한 모습이 역력하다. 프랑스 중부 보졸레 지방에서 그해 수확한 포도로 만든 햇포도주인 보졸레 누보는 2~3년 전만 해도 비행기 공수 장면을 중계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지만 이젠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지난해 해외 판매량이 전년도보다 800만 병이나 줄어드는 시련을 겪었다.

이 포도주가 퇴물이 돼가는 모습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우선 생산지 도매가격이 올해까지 6년 연속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생산 농가들은 "품질을 높이려고 더 많은 생산비를 들였는데도 가격은 되레 떨어졌다"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해외 판매도 시들해졌다. 과거 일본과 함께 주요 수입국의 하나였던 한국만 해도 수입업체들이 올해분의 도입을 포기하거나 물량을 과거보다 확 줄였다.

사정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에서 '거품'이 빠지면서 찾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프랑스에서 2~5유로(약 2400~6000원)면 살 수 있는 것을 일부 고급음식점 등에서 '프랑스산'이란 걸 내세워 무려 10만원 가까이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소비자들이 다양한 포도주를 접하고 난 뒤 상황이 바뀌었다. 가격과 명성에 거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거품은 '전 세계 동시 출하'라는 마케팅 기법이 만들어 낸 신화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마치 새해 맞이 이벤트를 펼치듯 지구촌 모든 곳에서 반드시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를 기해 보졸레 누보를 팔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국 같은 곳은 병입을 마치자마자 비행기로 긴급 공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가격에 반영됐다. 여기에다 '신화' 창조를 위한 마케팅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이제 소비자들의 보졸레 누보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비싸게 팔릴 포도주가 아니다'로 내려진 듯하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와 포도주스의 중간쯤 되는 음료'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보졸레 누보는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드문 햇포도주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개성이 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의미조차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거품이 쓸려 나가면서 본디 가치조차 함께 씻겨나간 것일까?

거품이 심해지면 치러야 할 대가도 커진다. 오늘날 초라해진 보졸레 누보의 모습이 그것을 말해준다.

박경덕 파리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