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장훈 칼럼

윤 대통령은 책임총리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입력 2022.09.0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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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칼럼 제목을 보시고 독자들께서는 고작 식상한 책임총리 이야기를 또 꺼내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한편 대통령실 참모들은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인 한덕수 총리는 아마 무표정으로 일관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추석 연휴에 윤석열 대통령이 여러 현안에 파묻혀 지내기보다는 당선 이후의 지난 6개월을 조용히 반추해보길 권하고 싶다. 6개월의 기쁨, 흥분, 실망, 대통령직의 무게감 등을 두루 살펴 윤 대통령이 책임총리제의 길을 선택하기를 기대한다.

헌법주의자 대통령이 결단해서
행정은 한 총리에 대거 맡겨야
대통령은 굵직한 어젠다에 집중
격변의 시대, 리더는 숲을 봐야

필자는 한덕수 책임총리가 윤석열 정부 초반의 무질서를 최소화하고 국정운영에 리듬을 불어넣는 역할을 적절히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윤 대통령이 한 총리에게 책임총리의 권한을 포괄적으로 부여해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세 가지이다.

① 현 정부에서 풍부한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의 리스크와 효과, 일의 급소와 완급을 꿰뚫고 있는 인물은 한 총리이다. ② 윤 대통령의 기본가치는 헌법정신으로 요약되는데, 우리 헌법은 “국무총리는…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헌법 86조) 헌법주의자 대통령이 헌법정신을 다시 한번 숙고해 볼 만하다.

③ 윤 대통령의 임기는 수십 년만의 역사적 결절점과 겹쳐 있는 시기이다. 연초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전쟁은 단지 지구 반대편의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는 이념과 경제사슬의 진영화, 불안의 일상화, 파시즘의 본격 대두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대격변의 시기에 리더는 정책의 나무보다는 역사의 큰 물줄기를 가늠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먼저 한 총리의 풍부한 경험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지난 7월 29일 교육부총리가 5세 취학 학제 개편안을 발표하자마자 온라인에서 학부모들의 반응은 황당함과 분노로 뒤덮였다. 사안의 폭발성을 즉각 감지한 한 총리는 이틀 만에 “아이마다 발달 정도가 다르고 가정과 학교의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각별히 유념해야한다. 국민이 불안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했다. 정책 변화가 가져올 리스크,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 발빠른 대응은 오랜 행정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생 검찰의 수사 서류에 파묻혀 지내온 윤 대통령이 갑자기 모든 정책 분야에서 일의 완급 조절과 경중의 구분,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 정책 정당성의 확보를 능숙하게 해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풍부한 경험과 정책역량을 두루 갖춘 한 총리를 일찍이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가? 행정의 달인을 발탁한 만큼, 총리가 각 부처의 일상 업무를 지휘하고 윤 대통령은 책임총리에게 큰 방향만 정해 주는 방식의 책임총리제로 가는 결단만 남아 있는 셈이다.

둘째, 윤 대통령이 한 총리에게 책임총리의 역할을 맡기는 것은 헌법주의자 윤 대통령의 성향과 목표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헌법은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역대 대통령들은 대부분 헌법이 천명하는 책임총리의 정신을 외면해왔다.

실제 대통령과 책임총리의 현실적 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 사실이고, 과거의 일부 시도들은 대부분 흐지부지된 바 있다. 하지만 모호한 부분을 슬쩍 건너뛰는 것이 헌법주의자의 길은 아니다. 윤 대통령의 의지와 한총리의 경험이 시너지를 낸다면, 윤 대통령은 대통령 어젠다에 집중하고 책임총리는 일상적 국정운영에 전념하는 시스템은 서서히 정착될 수 있다.

셋째, 필자가 책임총리를 말하는 까닭은 윤 대통령이 정책 디테일에 약하니, 한 총리에게 행정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라는 뜻이 아니다. 대통령은 정책 디테일보다 긴 역사 속에서 자신의 5년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늘 고민하며 결정해야 한다.

마침 세계는 앞서 말한 대로 21세기판 30년 전쟁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20세기의 초반 30년간(1914~45년) 세계는 경제 양극화와 대공황, 파시즘의 대두, 그리고 자유진영과의 대혈투를 겪은 바 있다. 우리의 21세기도 서서히 이러한 대혼란과 충돌의 시대로 한 발 한 발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경제와 안보, 기술의 판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격변의 시기에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긴 호흡과 역사 감각이다. 불타는 세계 속에서 매일매일 불안에 시달리는 시민들에게 미래의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울 역할이 윤 대통령에게 지워져 있다. 윤 대통령은 그간 자유, 글로벌 중추국가 등을 제시해왔지만 이런 비전들이 아직까지 시민들의 일상적 감각에 와 닿지는 못하고 있다.

정리해보자. 참모들과 부처 장관들이 끝없이 들고 오는 서류 더미는 한 총리에게 맡기면 된다. 그 시간에 윤 대통령은 DJ와 YS, 박정희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과 실패를 하나하나 되돌아봐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이 곧 대통령학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참모들이 오늘의 일을 처리하는 존재라면 리더는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만드는 사람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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