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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국식 도광양회’ 전략 절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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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용민 WTC 서울 대표·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최용민 WTC 서울 대표·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미·중 패권 경쟁 와중에 대한민국의 대외전략으로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 자주 회자한다. 1992년 8월 수교 이후 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2003년에 전년보다 무려 47.8% 늘어난 498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대미 수출(428억 달러)을 추월하자 안미경중의 현실적 토대를 제공했다. 또한 북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로 중국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미·중 사이의 어정쩡한 줄타기가 묘수이자 현명한 절충안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2016년 말 사드(THAAD) 사태 이후 새로운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던 일부 기업들이 핍박받아 철수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던 한국 드라마와 게임 등 K콘텐트가 중국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게다가 최근의 미·중 대결은 단순히 엄포 수준을 넘어 기술전쟁으로 확전하면서 냉전 시대로 회귀하는 흐름을 만들고 있다. 미·중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달라고 한국을 압박하는 상황이 됐으니 안미경중이라는 줄타기에 종언을 고해야 할까.

미·중 택일도, 저자세도 답 아냐
한국 실익 추구, 기술초격차 유지
중국 꿰는 ‘지중 인프라’ 투자를

속시원하게 안미경중을 던져버리고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외치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중국이 2030년 언저리에 미국을 제치고 가장 큰 글로벌 시장이 될 것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미래산업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구축해야 하는데 중국을 대체할 다른 파트너가 없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수산화리튬의 중국산 수입액이 올해 상반기에 404% 증가해 대중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한국이 반도체를 무기 삼아 중국을 압박할 수 있다고 일각에서 언급하지만, 그 이면을 고려하지 않은 단견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중국 공장을 통해 전공정(웨이퍼 가공)을 진행한 후에 한국으로 수입해 후공정(웨이퍼 절단·포장) 처리하는 산업 내 분업에 집중한다. 이 때문에 한쪽만 마비돼도 양국 모두에 피해가 돌아간다.

냉정하게 경제와 안보를 균형적으로 고려한다면 안미경중은 약간 수정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실용적인 대안은 속으로 실력을 키우되 겉으로는 상당 기간 대외적인 언행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일본의 대중국 대응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72년 대만과 단교하고 일·중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과 과거 일제의 침략에 대한 공식 사죄를 수용했다. 뜨거운 감자인 센카쿠(댜오위다오) 열도 문제도 ‘미해결 보류’라는 절충식 해법으로 논쟁을 피했다. 수교 후에도 외교적 이슈가 돌출할 때마다 일본은 고위 인사를 파견하고 기업을 통한 비공식 교류로 중국에 다가갔다. 일본은 중국을 중장기적으로 분석하는 연구소와 전문가들로 세계 최고 수준의 ‘지중(知中) 인프라’를 구축했다.

미·중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외교는 피해야 한다. 대중국 저자세 외교도 답이 아니다. 실익은 취하되 충돌도 피하는 한국식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실력을 키움) 전략이 필요하다. 도광양회를 제대로 구사하려면 우리의 속뜻 표출을 가급적 자제하고, 우리와 멀어지면 중국에 손해라는 인식을 하도록 한국이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외교에서는 일정 수준의 마찰이 생겨도 물속의 오리가 끊임없이 물갈퀴 질을 하는 것처럼 비공식 고위급 접촉을 늘려야 한다. 중국 고위관료는 은퇴 후에도 현직 때와 거의 비슷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관행을 고려해 은퇴한 고위관료를 통한 비공식 특사급 외교와 민간 교류도 활용해야 한다.

중국 언론의 자극적 보도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중국 언론은 대외용이 아닌 대내용이란 측면을 유념해야 한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지중 인프라 강화에 더 투자해야 한다. 중국은 젊은 인재를 북한에 파견해 현지 언어를 철저히 배우도록 하고 외교관들을 중국-한국-북한을 오가는 셔틀근무를 시켜 한반도 전문가로 체계적으로 육성한다.

이웃이 싫으면 이사하면 되지만 국가는 이사할 수 없다. 그러니 중국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경쟁자다. 대외 확장 전략인 중국몽(中國夢)을 추진하는 중국을 상대로 한국의 실익을 극대화할 한국식 도광양회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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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WTC 서울 대표·전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