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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정부조직진단은 ‘FAST정부’가 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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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원숙연 한국행정학회장·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원숙연 한국행정학회장·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지난 7월 윤석열 정부가 향후 5년간 정부 인력 효율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공직사회에 적지 않은 긴장감이 감지된다. 노무현 정부(97만명), 이명박 정부(99만명), 박근혜 정부(103만명), 문재인 정부(116만명)로 이어지면서 공무원 인력은 줄곧 증가해왔다. 인력의 양적 증가도 문제지만 늘어난 인력이 적재적소에서 국민이 원하는 정책과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제공하지 못하고 미래의 행정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더 근본적 문제다.

그간 행정 환경 변화에 대응해 개별 부처 단위의 조직 진단과 그에 따른 미세조정은 있었지만, 인력 효율화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직 진단은 2006년 이후 16년 만이다. 지난 16년간 정부의 존재 이유와 역할 범위를 둘러싼 환경 변화의 폭과 속도를 고려하면 이번 인력 효율화를 위한 조직진단은 늦어도 많이 늦었다.

공무원 인력 급증, 16년만에 진단
큰정부, 작은정부가 본질은 아냐
미래 핵심 분야에 인력 재배치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서구 선진국은 오래전부터 ‘전통적 정부’에서 벗어나 ‘클라우드 정부’ 등 완전히 새로운 ‘미래정부’를 향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왔다. 늦었지만 과학적 조직 진단을 통해 수명이 다했거나 쇠퇴한 기능 폐지 또는 축소, 유사·중복 분야의 불필요한 인원 감축, 감축된 인원의 미래 핵심분야 집중 재배치를 위한 이번 정부 인력 효율화 방안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범정부 조직 진단의 핵심은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면 제대로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몇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조직 진단을 단순히 ‘큰 정부 대 작은 정부’의 도식적 프레임에 가둬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팬데믹, 미·중 패권 경쟁, 글로벌 공급망 위기, 거시경제 위협, 사회적 격차 심화와 산적한 개혁 과제 등 ‘퍼펙트 스톰’ 파고(波高) 앞에서 정부의 기계적 크기 논쟁은 너무 한가하다. 정작 고민해야 할 것은 인력 규모에 매몰된 기계적 크기가 아니라 새로운 정책 어젠다를 발굴해 미래의 행정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각 부처의 존재 이유와 역할 범위의 재확인이어야 한다. 인력 감축은 그것의 작은 결과다.

이를 위해 조직 진단의 기준으로 ‘FAST’(Flat·Agile·Streamlined·Tech-enabled)를 제안한다. ‘FAST 정부’의 요체는 미래 행정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다. 관료제 구조를 벗어나 경계를 줄이고 개방적이며(Flat), 유연하고 신속한 정책 결정과 서비스제공(Agile), 활발한 데이터 공유와 불필요한 중복 제거(streamlined), 혁신기술에 기반을 둔 개방형 지능정부(Tech-enabled)다.

각 부처는 FAST를 기준으로 수명이 다했는데도 관성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기능을 제거하고, 민간(외부)에 업무를 적극적으로 이양하며, 유사중복 업무를 통폐합해 불필요한 경계를 줄이는 과감한 변화를 가시화해야 한다. 이 모두는 실질적인 규제 개혁과 직결되며, 규제가 사라진 자리는 미래 정책과제로 채워야 한다.

둘째, 각 부처는 조직 진단의 주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조직 진단은 과거와 달리 외부 시각과 자체 조직 진단을 통한 내부 시각이 접점을 이루도록 설계했다. 자체 조직 진단 결과에 대한 민간 전문가의 점검 과정을 병행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각 부처가 돼야 한다.

책임 장관제의 취지에 부합하고 부처가 정책 현안에 기민하게 대응하도록 ‘자율 기구제’를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직 진단을 통해 감축된 인원을 신규 핵심 분야에 재배치하는 ‘통합 활용 정원 제도’는 분명한 기회 요소다.

따라서 이번 진단을 위협이 아닌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부처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만일 기존의 업무와 경계를 고수하고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식으로 소극적·방어적 자세로 조직 진단에 임한다면, 역설적이게도 부처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연(鳶)은 순풍이 아니라 역풍일 때 가장 높이 난다. 우리가 직면한 복합위기를 더 높이 날아오르기 위한 ‘역풍의 동력’으로 만드는데 이번 범정부 조직 진단이 의미 있는 또 하나의 시도가 되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숙연 한국행정학회장·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