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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왕실도 의뢰…1만시간 조각하는 '21세기 미켈란젤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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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X 볼 작가는 프리즈 서울 전시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NFT 앞에 선 작가. [LG전자 제공]

배리 X 볼 작가는 프리즈 서울 전시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NFT 앞에 선 작가. [LG전자 제공]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대체불가토큰(NFT)으로 환생했다. 지난 5일 성료한 아트페어 2022 프리즈(Frieze) 서울 전시에서다. 배리 X 볼이라는 미국 작가가 LG 올레드TV를 활용해 만들어냈다. 그의 전시는 유명 예술 매체인 아치(Artsy)에서 “꼭 봐야할 전시 10선”에도 랭크됐다. 전시 부스에서 지난 5일 만난 그는 “유화와 붓 역시 약 500년 전에는 전에 없던 혁신적 도구였다”며 “NFT가 지금은 생소할지 몰라도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배리 X 볼의 주력 분야는 조각, 그 중에서도 CNC 밀링이라는 자동화 공작 기계로 금형부터 석재까지 다양한 소재를 정밀하게 깎아내고 다듬는 분야다. 대리석과 같은 비교적 보편적인 소재가 아닌, 멕시코ㆍ이란ㆍ그리스 등 세계 각지에서 특이한 석재를 사용한다. 고전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현대적 기술로 빚어내는 작품을 제작해왔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유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CNC 밀링으로 제작한 것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 미술계에서도 화제였다. 두 작품을 세워놓자 무엇이 미켈란젤로인지 분간이 어려웠기 때문. ‘현대의 미켈란젤로’라 불릴만 하다. 그의 이 프로젝트를 두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담하고도 강렬하다”고 호평했다.

배리 X 볼 작가의 '피에타.' [Copyright Barry X Ball, https://www.barryxball.com]

배리 X 볼 작가의 '피에타.' [Copyright Barry X Ball, https://www.barryxball.com]

작가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란 원래 예술에선 모호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며 “(네덜란드에서 활약한 독일 출신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역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습작으로 그리며 재능을 갈고닦았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WSJ에 따르면 약 100만 달러(약 13억원)와 작업시간 총 1만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소재 구입비는 물론 가공 등의 공정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 1978년부터 뉴욕에서 활동한 그는 브루클린에 2만 제곱미터(약 6000평)에 달하는 거대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20명의 스태프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 중엔 한국인도 있다고 한다. 작가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스태프인데, 굉장히 유능하고도 차분해서 신뢰하는 스태프”이라며 “한국인들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거 같다”고 칭찬했다.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고객 중엔 재계 거물도 있지만 왕실도 있다. 모나코 왕실 알베르 대공은 자신과 부인 샬린 공주의 초상 조각을 그에게 의뢰했다. 한때 불화설이 일기도 했으나 둘의 관계가 공고하다는 메시지를 배리 X 볼의 작품을 통해 세계에 전달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 밖에도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유력 컬렉터들을 여럿이다. 이번 프리즈 서울 전시에서 NFT로 선보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초상 조각은 이탈리아의 한 수집가에게 의뢰받았다.

배리 X 볼 작가의 모나코 알베르 2세 초상 조각. [Copyright Barry X Ball, https://www.barryxball.com]

배리 X 볼 작가의 모나코 알베르 2세 초상 조각. [Copyright Barry X Ball, https://www.barryxball.com]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두상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교황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뒤 도금하는 입체적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2번의 방한에서 소록도 방문 등으로 적극적 행보를 보이며 한국인의 마음을 얻었던 요한 바오로 2세이지만, 작가에 따르면 교황은 동시에 스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고 고국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과 대립하는 등의 면모도 있었다고 한다. 작품엔 그래서 실제 스키 보드로 십자가를 만드는 등 여러 장치를 했다. 그는 “세상 모든 일엔 단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의미들이 합쳐져 있다고 본다”며 “나는 안에 숨어 있는 의미를 밖으로 조각해 꺼내는 작업을 즐긴다”고 말했다. 조각을 겹겹이 구상하고 실제로 가공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NFT로 만든 영상엔 작품의 상세 단면과 도금 전과 후 등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요한 바오로 2세를 주제로 한 NFT 작품 앞에 선 배리 X 볼. LG전자와 LG아트랩의 제안으로 NFT를 만들 결심을 했다. [LG전자 제공]

요한 바오로 2세를 주제로 한 NFT 작품 앞에 선 배리 X 볼. LG전자와 LG아트랩의 제안으로 NFT를 만들 결심을 했다. [LG전자 제공]

그런 그의 NFT 작품이 이번이 처음인 건 의외다. LG 측의 제안을 받은 뒤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NFT를 하면 제대로, 높은 질을 담보하는 상태에서 해야지, 아니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며 “한국과 좋은 인연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만큼, 앞으로 한국을 테마로 한 작품도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이름엔 왜 ‘X’가 있는 걸까. 작가는 싱긋 웃더니 다소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 새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고, 결국 로스앤젤레스(LA) 근교의 집을 떠나 뉴욕에 정착하면서 생부의 성인 ‘볼’을 되찾았다”며 “예전 성(姓)이라는 의미의 ‘엑스(ex, 前)’이란 뜻도 있고, 로마자 ‘X’가 의미하는 숫자 10의 의미도 담았으며, 중세 시대 신부의 ‘X’ 표시가 권위의 도장과 같았다는 여러 스토리를 녹여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처럼 그의 이름 역시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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