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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수술 받는데 7년..."한달 10번" 딸 발작에 엄마는 운다

중앙일보

입력

27살 A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뇌전증을 진단받았다. 어느 날 새벽 소리를 크게 지르며 눈이 뒤집히는 발작 증상이 나타나 서울 한 대형병원을 찾았다가 뜻밖의 병명을 듣게 됐다. 10년째 병원을 바꿔가며 치료 중이지만 맞는 약을 찾지 못했다. 이전에는 새벽에 증상이 나타났는데 성인이 된 후로는 낮에도 안심 못 할 상황이 이어져 일상 생활이 어렵다. A씨 엄마는 “한 달에 열 번 넘게, 심할 땐 하루 3~4번씩 30초에서 1분간 증상이 나타난다”라며 “서서 소변을 본 적도 있는데 아이는 기억을 못 한다. 친구 만나러 갔다가 증상이 나와 급히 아이를 데리러 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혼자 놔두면 돌연사할 위험이 있다고 해 항상 가족 1명이 붙어있어야 한다.

뇌전증을 앓는 9세 아이 사연을 전한 채널A의 '금쪽같은 내새끼' 한 장면. 사진 채널A 캡처.

뇌전증을 앓는 9세 아이 사연을 전한 채널A의 '금쪽같은 내새끼' 한 장면. 사진 채널A 캡처.

의사는 올해 3월 수술 치료를 하자고 결론 내렸지만 대기 환자가 많아 빨라도 1년 6개월 뒤에야 가능한 얘기라고 한다. A씨 엄마는 “직장도 갖고 결혼도 해야 할 젊은 나이인데 빨리 병을 고쳐주고 싶다”며 “희망은 수술뿐인데 한 두 달도 아니고 말이 1년 반이지 의사가 학회나 휴가를 가면 얼마나 더 지연될지 모른다고 해 답답하다”라고 했다. 그는 “최근 아이에게 우울증 증상까지 생겼다”라며 “이런 시간이 길어져 아이가 이상한 마음을 먹을까 봐 불안하다”라고 토로했다.

A씨처럼 약으로 조절이 안 돼 수술이 필요한 뇌전증 환자가 연간 2만명에 달하지만 수술 가능한 병원은 전국 6곳뿐이고 한해 수술 건수는 200건도 채 되지 않아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뇌전증 환자가 치매 환자의 절반 정도되는데 정부 예산은 300분의 1 수준이라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뇌전증은 뇌세포가 주고받는 전기적인 신호에 갑작스레 이상이 생기면서 경련이나 의식 소실, 이상 행동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병이다. 치매·뇌졸중과 함께 3대 신경계 질환으로 꼽힌다. 과거 ‘간질’이라 불렸다가 편견 탓에 이름이 바뀌었다. 최근 한 육아방송에서 뇌전증으로 매일 기름을 먹는(식이요법) 9세 아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관심이 커졌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10세 이하와 65세 이상에서 환자가 많지만 뇌종양과 뇌경색 등 여러 원인으로 뇌가 손상을 받으면 발병할 수 있다”라며 “0~100세 전 연령대에 걸쳐 환자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홍 교수에 따르면 국내 환자는 36만명 정도 되고, 매년 2만~3만명씩 환자가 추가되고 있다. 70%는 항경련제로 치료할 수 있고 A씨처럼 약이 듣지 않는 약물 난치성 환자가 30% 정도 된다. 3개 이상 항경련제를 먹어도 한 달에 1차례 이상 발작이 나타나는 경우 중증 환자로 보는데 4만5000명가량이고, 이 가운데 수술이 아주 급한 이들은 약 2만명으로 추산된다는 게 홍 교수의 설명이다. 이들도 수술하면 80% 이상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연간 뇌전증 수술 건수는 2019년 121건, 2020년 154건, 2021년 145건, 2022년(1~7월) 29건 등 수술이 필요한 환자 수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홍 교수는 “1년에 200건씩 수술해도 2만명이면 100년이 걸린다는 얘기”라며 “최소 매년 몇백명씩 추가되는 난치성 환자 수보다는 수술을 더 해야 대기 환자가 줄어들 수 있다”라고 했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뇌전증 수술 전에 필수로 해야 하는 비디오 뇌파검사까지 받고 수술 순번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환자만 추려봐도 2021년 기준 972명에 달한다. 인재근 의원은 “2021년 수술 건수(145건)를 토대로 단순 비교하면 수술까지 약 6.7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대기가 이렇게 긴 이유는 수술할 장비와 인력이 부족한 탓에 수술에 나서는 병원이 없어서다. 인재근 의원실에 따르면 전국에 뇌전증 수술이 가능한 곳은 서울에 5곳(서울대병원·신촌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아산병원·고대구로병원)과 부산에 1곳(해운대백병원) 등 6개뿐이다. 수술 가능한 의사도 9명에 불과하다는 게 의원실 설명이다. 그마저도 수술 시간이 1/3로 짧고 치료율(80~90%)이 좋으며 뇌출혈 등의 부작용 가능성도 낮은 로봇 수술을 할 수 있는 데는 세브란스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두 곳뿐이다. 홍 교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복잡한 수술인데도 수가가 낮다 보니, 10억원에 달하는 로봇을 구입해 수술에 나설 병원이 없다”고 설명한다. 앞선 두 병원은 각각 산업통상자원부와 보건복지부 예산 지원을 받아 로봇을 들였다.

홍 교수는 “암과 뇌종양을 수술할 병원은 수백~수천개인데 뇌전증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은 광역시당 한 곳꼴도 안 된다”라며 “로봇이 없는 병원들은 점점 수술을 줄여 지금 가능한 6곳 중 2곳도 곧 수술을 못 하게 될 상황에 놓였다”라고 했다. 소위 돈벌이가 안 되니 환자에 복잡한 수술을 설명할 전문 간호사와 뇌파 검사 등을 진행할 보조 인력 투자에 나서기도 쉽지 않다. 홍 교수는 “많을 때는 10곳 이상 병원에서 1년에 수술을 400건가량 했는데 뇌전증 수술이 죽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재근 의원은 “지난해 기준 복지부의 치매 지원 예산은 2000억원이 넘는데 뇌전증 예산은 7억여원에 그쳤다”라며 “뇌전증 환자가 치매 환자의 절반 가까이 되지만 예산은 300분의 1에 불과해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승봉 교수는 “뇌전증 환자는 혼자 있을 때 전신발작을 하다가 사망할 위험이 크다. 예기치 않은 사망이 1000명당 1명꼴로, 36만명 환자에 대입하면 매년 360명, 하루 1명이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보던 환자 중 올해만 해도 3명의 20~30대 환자가 이렇게 숨졌다. 수술하면 이런 돌연사율을 1/3로 줄여 3명 중 2명을 살릴 수 있다. 어렵고 안 하려 하는 수술을 병원이 할 수 있게 국가가 나서 지원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뇌전증 환자의 3명 중 1명은 극단선택을 생각해 정서적 지원도 필요하다”라며 “뇌전증지원센터는 전국에 단 한 곳뿐인데, 치매지원센터(치매안심센터 의미, 전국 256곳)처럼 확대하고 로봇 수술을 급여화(건강보험 적용)하는 것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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