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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울대생 이푸르메가 고발한다

BTS 병역을 여론조사로? 특례 찬성했던 男도 "X소리" 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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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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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입대 관련 여론조사를 언급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배경은 BTS 공연 장면. 그래픽=박경민 기자

BTS 입대 관련 여론조사를 언급한 이종섭 국방부 장관. 배경은 BTS 공연 장면. 그래픽=박경민 기자

지난 2021년 초 해군에 입대해 20개월의 병역을 마쳤다. 해군은 내가 선택했지만, 군대에 가느냐 마느냐는 결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은 누구나 병역법에 따라 국방의 의무를 지기 마련이고, 나는 이를 따랐을 뿐이다. 군 20개월 가운데 18개월 동안 배를 타면서 만났던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도 그랬다. 유명 프랜차이즈 기업 부점장, 현직 작곡가, 해외 명문대 휴학생, 비록 짧지만 일평생 어업에 종사하다 온 사람 등등. 심지어 지병이 있거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입영한 사람도 있었다. 다시 말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군대에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불만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영내에서는 아무도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내가 이행하는 병역의 당위성을 돌아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어른들은 청년기를 흔히 ‘무한한 가능성’으로 표현한다. 이런 어법을 따르자면 우리 모두 자신의 찬란할 미래를 유보한 채 병역 이행을 결단한 것인데, 사실 그런 비장함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저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은 헌법과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는, 병역 의무를 이행한다는 단순함이 전부였다. 남성 전체에 병역 의무를 부과하기로 합의한 우리 사회의 오랜 공론(公論)을 존중하기에 마땅히 이를 이행해야 한다는 공감대 말이다.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지.” 어른들이 했던 이 얘기를 이젠 나도 한다.

지난 6월 20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15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열린 입영식에서 입영 장병들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지난 6월 20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15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열린 입영식에서 입영 장병들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런데 정치인들의 뇌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모양이다. 방탄소년단(BTS) 병역 문제로 연일 사회가 술렁이는 걸 보면서 든 생각이다. 지난달 3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설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BTS 병역 문제를 빨리 결정하라"고 촉구하자,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조속한 해결을 약속하며 여론조사를 조속하게 실시할 거라고 말했다. 그동안 병역의 유일한 판단 기준이었던 병역법을 젖혀두고 국민 여론에 따라 입대 여부를 정하겠다는 국방부 장관 발언에 여론이 들끓었다. 논란이 커지자 국방부는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하루 만에 "국방부가 여론조사 하는 일은 없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민심을 읽고 재빨리 번복했으니 그걸로 된 걸까. 아니다. 애초에 이런 발상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원칙과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 매우 실망스럽다. BTS든 누구든 어떤 특정인에게 병역 특례를 적용하느냐 마느냐를 인기 투표와 같은 여론조사로 판단하겠다는 건 병역 문제를 우리 사회가 합의한 법적 질서 밖에서 찾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성일종 의원(국민의힘)은 “국가적 (BTS가 가져다줄) 이득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며 연일 국위선양과 경제적 파급효과를 병역 특례 적용의 근거로 제시했다. 성 의원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 모두 이런 논리가 매우 합리적이라 국민도 이해할 거라 믿으면서, 정작 그 결정의 책임은 국민(여론조사)에게 미루려 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수많은 내 또래 군필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심각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입대를 앞둔 서울대 남자 후배는 평소 BTS 병역 특례에 찬성 입장이었지만 여론조사라는 단어 하나에 "뭔 X소리"라는 욕부터 했다. 이게 우리 또래의 정서다.

BTS 병역 면제를 주장해 온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 관련 법안 발의도 했다. [뉴스1]

BTS 병역 면제를 주장해 온 성일종 국민의힘 의원. 관련 법안 발의도 했다. [뉴스1]

사회적 명성이 있다는 이유로, 국익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보통 남성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해온 병역의무라는 법과 원칙을 한순간에 굴절시켜 버리다니. 게다가 여론조사로? 순간의 시의(時議·당대 여론)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헌법상 국방의 의무마저 오락가락한다면 이보다 덜 중요한 일엔 얼마나 줏대 없이 결정할까 싶은 불안감도 크다. 솔직히, 억울하다. 대다수 병역 의무 이행자는 자신의 자유와 미래를 유보하고, 사회가 합의한 원칙과 법적 질서를 존중한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군말없이 입영했다. 그런데 ‘경제적 유용성’이라는 다분히 국가주의적 잣대를 내세워 BTS에게 병역 특례를 준다면 이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청년의 다채로운 인생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같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특례 기준이 필요하다면 제대로 만들어서 앞으로 적용하면 된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끌어와 어떻게든 BTS에 병역 특례를 주겠다는 정치인들이 제정신인가. 대한민국 국민인 남성 누구나 보편적으로 져야 하는 병역 의무마저 차등적으로 부과한다면 젊은 남성의 절망감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논란의 핵심은 BTS가 아니다. 정치인들이 병역 특례를 자신들이 선택적으로 베푸는 시혜로 보고 있다는 게 문제다. ‘국가의 명예를 세계만방에 떨쳤으니 특혜를 주겠다’는 발상, 이에 더해 여론조사로 결정하겠다는 안이한 판단은 대중의 인기를 노린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개개인의 삶의 방식 모두 공평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는 지금 청년들의 가치관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군 복무 중에 만났던 역도 선수 출신 한 수병의 자조 섞인 한탄을 기억한다.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들 전부 군대 빼던데. 정치인 본인이나 애들이나 군대 다녀온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BTS는 일도 아니지. ” 이런 말도 했다. “형, 나 나름 세계대회 메달리스트인데, 나라에서 군대는 가라더라. ” 이렇게 푸념하면서도 성실히 의무를 다한 건 사회의 원칙과 기준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역 특례가 정치권이 베푸는 하사품으로 전락하면 이 수병처럼 원칙대로 조금의 편의 없이 병역 의무를 다한 청년만 바보가 된다. 여론조사를 왜 BTS만 하나. 모든 사람이 군대 가기 전에  여론을 확인하자고 하면 어쩔 것인가.

군필자들이 미필자들에게 “군대는 뺄 수 있으면 무조건 빼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사람이 많을 거다. 아무리 사회적 합의와 법적 질서를 존중해도 군 생활이 인생의 손해라는 생각을 완전히 거둘 수 없어 나오는 말일 것이다. 나 역시 생사를 건 작전과 각종 훈련에 투입돼 때로 다치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먹지고, 씻지도, 자지도 못하며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보상을 원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존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사회에 돌아와 보니 국가와 사회공동체에 헌신한 시간을 보상받기는커녕 '군바리'라는 모욕적인 취급만 받는다. 그런데 인기가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옳지 않다.

군사용어 가운데 '정신전력'이라는 말이 있다. ‘조직화된 전투 의지’를 뜻하는 정신전력은 군인으로서의 임무 수행 의지와 자신감을 상징하는 군 전력의 중핵이다. 그런데 만약 군인이 병역을 이행하는 데 있어 불공정함이나 박탈감을 느끼거나, 국방의 의무라는 당위성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국가를 위한 헌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정신전력은 붕괴되고 이에 근간하는 국방체계 전체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여론조사도, 경제적 파급효과도 다 무의미하다. 우린 그런 사회를 원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