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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미국 ‘인플레 감축법’ 비밀 입법 후폭풍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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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지난달 16일 발효된 미국의 인플레감축법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구호였던 ‘더 나은 재건(Build Back Better)’ 정책의 일부로 제정됐다. 인플레감축법이라 명명됐지만, 의료보험 약값 한도 설정으로 의료비가 일부 줄어드는 것 외에 직접 인플레이션을 낮출 수 있는 내용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활용도를 높이고,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도를 올려 민주당이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반영된 것이다.

인플레감축법은 민주당이 단독 제안한 법이었다.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과 달리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50대 50으로 정확히 나누어져 있다. 이 법은 누가 봐도 11월 중간선거용인데 공화당이 지지할 리 없는 상황에서 조 맨친 민주당 상원의원이 민주당 안을 반대했다. 미국의 석탄 주산지 중 한 곳인 웨스트버지니아가 지역구인 그는 광물에너지를 줄이고 전기차 보급을 늘리는 보조금 지급에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주당 지도부는 인플레감축법을 놓고 당내에서 비밀협상을 진행했다.

중간선거 고려해 전격적 법 제정
한국 전기차 배터리 보조금 타격
국익 회복할 협상·로비전략 필요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지난여름 내내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의원을 필두로 민주당 지도부는 맨친 의원과의 수차례 비밀협상에서 조금씩 입장 차이를 좁혀 인플레감축법을 확정지었다. 막판까지 버티던 키어스틴 시네마 상원의원(애리조나)의 동의도 받아냈다. 비밀이 철저하게 유지되는 바람에 정보력이 뛰어난 미국제약협회도 약값 인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외부 로비가 어려웠다고 한다.

반도체 지원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바이든 행정부에서 삼성전자는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도 미국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짓고 생산라인을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의 배터리 업계도 북미 지역에 2025년까지 배터리 공장 11개를 건설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상·하원을 전격적으로 통과하고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된 인플레감축법에 한국 측이 허탈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인플레감축법에 따라 올해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미국에서 전기차를 조립해야 하고, 내년 이후에는 미국 내 생산 요건에다 북미 지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채굴한 광물과 가공된 배터리 소재를 사용해야 한다.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 10여 종이 올해 인플레감축법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북미에서 전기차 생산이 전혀 없는 현대기아차는 당장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현대기아차는 아마도 이런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우스꽝스러운 사실은 북미에 생산기지를 구축한 자동차 완성업체들도 내년부터 적용되는 광물 요건을 충족할 수 없어 적격 업체가 아예 없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도 비판이 적지 않다.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미국 측 설명이다. 중국 의존을 철저하게 경계하다 보니 중국과의 공급망이 촘촘한 한국 배터리 업계도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반도체에 이어 배터리와 전기차에 대해 중국발 지정학적 리스크를 아예 없애겠다는 것이 인플레감축법에 담긴 취지다. 배터리 소재 및 기술에서 중국이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갖고 있더라도 중국을 배제한 것은 국가안보 측면이 경제적 요소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주당 핵심 인사들의 비밀 협상을 통해 타결된 법안이므로 자동차 강국 독일과 일본도 미국 의회를 상대로 로비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맨친 의원의 주장이 많이 반영돼 입법 취지가 퇴색했다는 지적도 있다. 11월 중간선거 일정에 맞춰 급하게 법이 발효됐지만, 앞으로 시행령 등을 통해 세부사항이 조정될 것이다.

한국의 대응카드는 무엇일까. 세계무역기구(WTO)와 한·미 FTA 규범 위반으로 미국을 제소할 수 있지만, 양자 협의를 먼저 추진해야 한다. 최근 워싱턴DC를 방문한 정부대표단을 시작으로 꾸준한 협의가 필요할 것이다. 필요하면 유럽연합(EU)·일본과도 공조해야 한다. 중간선거 이후 정국 상황까지 고려해 국익을 살릴 협상 및 로비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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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