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곤조곤 존댓말로 몰아붙이는데 겪어봐야 무서운 줄 안다.”
한덕수 국무총리의 질책을 받아 본 정부 고위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 총리가 지난달 28일을 기점으로 취임 100일을 넘겼다. 야당은 ‘식물총리’, ‘의전총리’라 비판하지만 한 총리를 겪어본 국무위원과 참모들 사이에선 “예상과는 다르다”는 말도 나온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정책 관련해선 장악력이 강하고, 장관들을 매섭게 질책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한 총리는 후보자 시절인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당시 국무위원 서면 추천서에 직접 서명을 했다. 책임총리제 구현의 일환이란 설명이 따라붙었다. 그는 지금 ‘책임총리’와 ‘식물총리’ 사이 어디에 가까울까.
윤핵관 반발에 첫 인사부터 막혔던 韓총리
한 총리의 시작은 썩 좋지 않았다. 지난 5월 총리실의 이인자인 국무조정실장(장관급) 인선 때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인 윤종원 IBK기업은행장을 추천했지만, 윤핵관(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과적으로 방문규 전 한국수출입은행장으로 우회했는데, 이를 두고 여권에선 “총리보다 윤핵관이 세다”는 말이 나왔고 야당은 “인사권도 없는 식물총리가 분명해졌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한 총리의 존재감은 곧 발현되기 시작했다. 먼저는 광복절 특별사면 국면으로, 7월 말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사면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한 총리의 건의대로 두 사람은 광복절 사면으로 복권됐다. 윤석열 정부의 실세 장관이라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말을 아끼던 사안이라 더 주목받았다.
한 총리는 ‘만5세 조기입학’ 논란이 불거진 지난달 1일에는 ‘맘카페’ 여론을 보고받고 박순애 전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정책 발표를 어떻게 한 것이냐”며 질책했다. 당시 상황을 전한 보도자료에는 “여러 의견을 경청하라고 지시했다”고 돼 있었지만, 실제 대화 내용은 달랐다고 한다. 대통령실 사회수석의 브리핑은 한 총리의 질책 다음 날에 나왔다. 대통령실보다 총리실의 대응 지시가 한발 앞섰던 것이다. 당시 한 총리의 전화를 곁에서 들은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내가 박 전 부총리였으면 좀 무섭지 않았을까 싶다”고 전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지만, 정책에 대한 한 총리의 ‘그립’이 드러난 장면이기도 했다.
지난달 18일에 발표된 위성영상 규제 개혁의 경우도 한 총리가 국정원장과 국방부 장관을 총리실로 직접 불러 “당장 해결하라”며 독려한 사안이다.
한 총리는 하루에 많게는 10개 넘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달 25일 수원 세 모녀 빈소 조문의 경우 참모진이 “일정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한 총리가 “무조건 가야 한다”여 밀어붙였다고 한다. 총리는 관례상 KTX 특실을 탈 때 두 자리를 예매한 뒤 옆자리를 비워두지만, 지금 한 총리 옆엔 항상 참모가 앉는다. 세금을 아끼라는 지시 때문이다.
'윤핵관''검핵관''용핵관'에 韓은 없다
하지만 야당은 한 총리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윤핵관’외에 ‘검핵관(검찰 핵심관계자)’이나 ‘용핵관(용산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 같은 신조어가 쏟아지는데, 모두 한 총리 외 인물들의 권력 구도를 묘사한 단어들이다. 윤석열 정부의 잇따른 장관 후보자 낙마 과정에서 “한 총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말도 나온다.
한 총리가 언론 인터뷰나 국회 질의 과정에서 “공무원 임금을 낮춰야 한다”라거나 “대통령실 사저는 벙커 수준”이라 말하고, 1기 신도시 공약 파기 논란에 “어느 정도 국민께서 이해를 잘 해주실 수 있는 사항”이라 답한 것을 두고 정무감각이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책 관리 측면에서 한 총리가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노무현 정부 총리 출신으로 야당과의 협치 통로가 될 것이란 기대는 충족하지 못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윤 대통령에게 비판이 쏟아지기 전에 총리가 먼저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