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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 주역 혹은 소련 붕괴시킨 지도자…고르바초프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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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냉전을 종식시킨 영웅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무력한 지도자. 이른바 ‘철의 장막’을 걷어낸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91세.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EPA=연합뉴스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EPA=연합뉴스

30일(현지시간) 러시아 인테르팍스·타스통신 등은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을 인용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는 비교적 최근까지 고르바초프 재단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이슈에 목소리를 내왔지만, 지병을 이기지 못했다.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아왔고, 지난 2016년 11월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수술을 받았다. 당시 러시아 언론은 고르바초프가 수술로 심장박동기를 달았다고 보도했다. 고인은 장례 절차를 거쳐 니키타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이 묻힌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고르바초프는 서구와 옛 공산권에서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서구에서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로 대표되는 개방 정책을 통해 냉전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킨 주역이다. 1985년 집권 첫 해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부르던 강경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스위스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하고 데탕트(긴장 완화)와 군축 시동을 걸었다. 1987년 미·소 정상 간에 첫 조약인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이어 1989년 12월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몰타 회담을 통해 양국의 적대행위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이러한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75년 수상자인 인권·평화 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 이래 소련 시민으로 두 번째다.

고르바초프가 열어놓은 체제 화합의 길을 통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이를 소련이 무력으로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독일 통일도 가능했다. 지난해 3월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고르바초프의 90세 생일을 맞아 “냉전을 종식하고 세계 평화를 정착시켰으며 자유로운 독일 통일에 기여한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어 영광이다. 당신이 독일에 한 일은 영원히 잊힐 수 없을 것”이라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면 국내에서 그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려던 강경파와 더 빠른 변화와 분권을 원하던 개혁파 사이의 위태로운 중간지대에 있었다. 때문에 제대로 된 설계 없이 이들을 조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소련을 무너뜨리고 이후 러시아에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부패 경제를 초래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이후 권력을 잡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990년 6월 1일(현지시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담 후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0년 6월 1일(현지시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담 후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00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지도자. AP=연합뉴스

2004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지도자. AP=연합뉴스

고르바초프는 1931년 러시아 남부 캅카스(코카서스) 산맥 인근 스타브로폴주(州)의 시골 지역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확기를 모는 등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지만, 명석한 두뇌로 1952년 모스크바대 법과대학에 입학하고 그해 공산당원이 됐다. 대학 졸업 이후엔 콤소몰(공산주의청소년동맹)과 스타브로폴 지역 조직에서 여러 직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중앙 정계의 관심을 받았다. 1970년대 초 스타브로폴 제 1서기겸 당 중앙위원을 시작으로 중앙당 농업담당 서기에 올라 주목을 받았고, 이후 1980년 공산당의 핵심인 중앙당 정치국원 자리에 임명됐다.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로 평가된 그는 이후 소련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도부의 인식과 함께 1985년 54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서기장 자리에 오른다. 소련의 8번째 지도자인 그는 앞선 7명과 달리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 태어났고, 대의보단 사회 문제를 더 많이 보면서 자랐다. 집권 후 언론 통제‧적대적 대외 관계 형성 등을 완화하는 개방적 태도로 소련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서기장이 된 후 약 6년간 지속된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이미 ‘아픈 곰’ 취급을 받던 소련의 사회와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 급진적인 개혁 정책은 소련 내 공산당 보수파의 불만을 샀다. 집권 이전부터 문제가 됐던 아프가니스탄 파병 비용 문제에 80년대 후반 유가 하락,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1986년)까지 겹치며 소련의 지도자로서 정치적 입지가 줄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고르바초프는 1990년에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해 권좌를 꿰차고 당 정치국의 입김을 피해 보려 했다. 하지만 공산당 보수파들은 1991년 8월 크림반도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를 연금시키며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8월 쿠데타). 그가 중앙 정계 진출을 도왔던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의 도움으로 쿠데타는 사흘 만에 제압됐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이후 소련 내 유력 공화국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옐친은 이후 소련 정부를 완전히 무력화한 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와 함께 소련 해체를 결정하고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을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 고르바초프의 짧은 사임 성명과 함께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결과 만들어진 민주적 제도로 (쿠데타라는) 시험을 견뎠지만, 이는 대통령의 입지를 어렵게 하고 약화시켰다. 소련을 유지하는 노력을 계속하기가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선 ‘소련 붕괴’의 장본인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었다.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나섰지만, 전체의 1%도 득표하지 못했다. 옐친은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부활을 철저히 막았고, 이후에도 러시아의 정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후 사회·경제 연구 연구소인 고르바초프 재단을 통해 활동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전 소련 대통령이 지난 2016년 12월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AP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AP=뉴시스

미하일 고르바초프전 소련 대통령이 지난 2016년 12월 모스크바에 있는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AP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 AP=뉴시스

슬하에는 외동딸 이리나(65)가 있으며, 이리나는 현재 고르바초프 재단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묻힐 자리는 평생을 사랑했던 부인 라이사의 곁이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1999년 라이사가 병으로 숨지자 “라이사를 잃은 것이 러시아를 잃은 것보다 더 슬프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역사상 첫 한‧소 정상회담을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과는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다시 만났고, 91년 4월엔 한국을 방문해 노 대통령과 제주도 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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