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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긴급조치 9호 피해자 국가배상”…7년 전 판례 뒤집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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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가 헌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유신정권 하에서 긴급조치로 피해를 본 이들에게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정치 행위라서 배상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박근혜 정부 시절 대법원 판결이 7년 만에 뒤집힌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1970년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한 피해자와 그 가족 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긴급조치 9호(‘국가 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는 박정희 전 대통령 때인 1975년 발표됐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이는 영장 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사건 피해자들은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시위를 논의하거나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 등으로 체포됐고, 2013~2014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2013년 정부를 상대로 112억여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패소했다. 대법원은 다르게 판단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다”며 “긴급조치 9호로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긴급조치 9호에 따른 기본권 침해가 강제수사와 재판, 유죄 판결을 통해 현실화됐고, 일련의 국가작용이 ‘전체적’이라는 취지다. 대통령뿐 아니라 수사기관, 법원 등 다수 공무원이 광범위하게 관여한 국가작용으로 국민이 손해를 입었다면 ‘전체적’으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발령하고, 수사기관이 이를 근거로 영장 없이 체포·구금해, 수사 및 기소와 법관에 의한 유죄 판결까지 모든 과정이 위법 행위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국가가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사정만 인정되면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점도 언급됐다.

다만 대통령 등 공무원 개인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를 두고 대법관 의견이 갈렸다.

다수가 대통령이나 법관 등 공무원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봤다. 반면 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대통령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한 직무 행위로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며 재판 법관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봤다.

현재 긴급조치 9호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은 대법원에서 24건, 하급심에서 9건이 진행 중이다. 소송 중인 사건에 향후 이번 선고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패소가 확정된 피해자는 다시 소송을 내기 어렵다.

시민단체 유신청산민주연대는 “50년 전 유신체제 하에서 당시 사법부가 남긴 오점을 사법부 스스로 청산한다는 역사적 의미”라고 이번 판결을 환영했다.

앞서 2015년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를 발동한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책임이 있을 뿐 법적 의무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당시에도 지난 2013년 전원합의체 결정인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무효”라고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배상 책임은 없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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