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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시시각각

'실리콘 방패' 반도체의 미국행 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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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난 2일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대만을 찾자 순식간에 이 지역은 살벌해졌다. 중국군은 펠로시 출국 직후부터 미사일을 쏴대는 등 여차하면 쳐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이 도발을 못 할 거로 예상했다. 미국도 미국이지만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지켜줄 거로 본 까닭이다.

"중, 반도체 우려로 대만 공격 자제" #삼성·SK, 미국에 대규모 투자 계획 #한쪽만 늘 유리하면 관계 나빠져

이렇듯 대만의 가장 굳센 방어벽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기업 TSMC란 논리가 세계에 퍼져 있다. 2000년 후반에 등장한 '실리콘 방패 이론 (Silicon Shield Theory)'이다(실리콘은 반도체의 핵심 소재다).
논리의 핵심은 TSMC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아 대만을 공격 못 한다는 거다. 또 중국이 도발해도 미국 역시 대만 반도체 없이는 견딜 수 없어 개입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실제로 전 세계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서 TSMC(54%) 등 대만 업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64%. 미·중 모두 고성능 파운드리 칩은 90% 이상 TSMC에서 들여온다. 실리콘 방패가 두 겹인 셈이다.
어떤 강대국도 다른 나라의 특정 산업이 자국의 이익과 직결되면 이를 공격하거나 파괴되는 걸 방관하지 않는다.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은 즉시 뛰어들었다. 당시 최고의 전략물자로 여겨졌던 석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개입하지 않았던 바이든 행정부도 중국의 대만 공격은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TSMC는 중국의 공격에서 대만을 지켜주는 성스러운 산맥"이라는 게 이 회사 설립자 모리스 창의 주장이다. 그는 펠로시 방문으로 대만이 위험해지자 "중국이 공격해 오면 TSMC 가동을 멈추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대만 신추시 TSMC 본사 앞에 걸린 대만 국기가 이 회사 사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만 신추시 TSMC 본사 앞에 걸린 대만 국기가 이 회사 사기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렇듯 대만은 반도체 산업을 안보 차원에서 중시하는데 우린 어떤가. 대만이 파운드리에서 1위지만, 메모리 쪽에선 한국이 단연 선두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 업체는 전체 시장의 56.9%를 차지해 2위인 미국(28.6%)의 2배를 기록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20년간 미 텍사스에 1921억 달러(257조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 11개를 짓겠다고 한다. SK하이닉스도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 등에 150억 달러(20조원)를 미국에 투자할 계획이다. 경제는 물론 안보의 대들보가 미국으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국내에선 반대는커녕 환영하는 분위기다. "양질의 일자리 수만 개를 뺏긴다"는 우려도 있지만 "'칩4'로 불리는 미국·일본·대만과의 반도체 동맹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미국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이 막대하다"는 찬성론이 더 크게 들린다. 한편에선 한국의 온갖 규제를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끄덕인다.
하지만 이런 논리엔 빈틈이 있다. 무엇보다 중국 견제 차원의 칩4 동참과 반도체 공장 이전은 완전히 다른 사안 아닌가. 이 땅에서 반도체를 만들어도 얼마든지 다른 멤버들과 협력할 수 있다. 둘째, 지원은 좋지만 높은 인건비와 건설비는 큰 단점이다. 지난 4월 모리스 창은 "높은 인건비 등으로 미국 공장에서 생산한 반도체가 대만에서 제조한 것보다 50% 더 비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면서 "TSMC가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 건 미 정부의 독촉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게다가 미국이 내놓은 '반도체 지원법'을 보면 기가 막힌다. 이 법은 외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는 대신 대상 업체에 대해 10년간 중국 내 신규 투자를 막는다. 이미 막대한 투자를 한 삼성·SK엔 중국에선 첨단 반도체를 만들어 팔지 말라는 얘기다.
문재인 정부 때 형편없이 망가진 한·미 관계 복원 차원에서 바이든 행정부를 돕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동맹 사이라도 안보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한쪽이 단연 유리한 일들이 계속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이런 동맹이 무슨 소용이냐"는 볼멘소리가 커질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