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지금 진짜 필요한 문해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어려운 한자어만 문제가 아니었다. 한 TV 데이팅 프로그램에 출연한 20대 여성은 ‘문어발’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제작진에게 “뜻을 잘 몰라요. 발이 많다는 건가요? 넓다는 건가요?”라고 물었다. 거리낌 없이 당당했다.
한 카페 사장의 “심심한 사과” 발언이 뜨거웠다. 마음이 깊고 간절하다는 ‘심심(甚深)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며 일대 논란이 일었다. 디지털 세대의 문해력 저하를 개탄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사흘을 4일로, 금일을 금요일로, 무운(武運)을 운이 없다로 오해한 유사 사례가 많았다. “굳이 어려운 말로 사과한 게 문제”라는 반응도 나왔다. 한 영화평론가가 ‘명징’ ‘직조’란 단어를 쓰자 일각에서 엘리트주의의 향연이라 비아냥댔던 것과 유사한 장면이다.

‘심심한 사과’ 의 뜻을 오해한 일부 트위터 사용자들이 남긴 댓글.              [사진 트위터 캡처]

‘심심한 사과’ 의 뜻을 오해한 일부 트위터 사용자들이 남긴 댓글. [사진 트위터 캡처]

한쪽에서는 유튜브 시대 독서나 한자 교육 부족이 낳은 어휘력의 빈곤, ‘문해력=사고력’의 위기를 걱정하고, 다른 한쪽에선 ‘언어=권력’에 무조건 반기를 드는 반지성주의, 반엘리트주의적 흐름이 맞서는 모양새다. 세대 변수도 있다. ‘심심한 사과’ 같은 한자어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가 있듯이, 기성세대는 인터넷 신조어에 약하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문해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다거나 젊은 층의 문해력이 기성세대보다 낮은 것은 아니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 성인 역량조사(PIAAC)에서 우리나라 성인(16~64세)의 문해력은 중상위권이었다. 16~24세 청년층은 최상위권, 45∼54세는 하위권, 55∼65세는 최하위권이었다. 고려대 국문과 신지영 교수에 따르면 가끔 인용되는 우리나라 실질 문맹률이 75%라는 충격적 결과도, 일반적 산문 문해력이 아닌 입사지원서나 그래프 등 양식이 있는 문서 문해력에 한정된 수치다. 그것도 2001년 조사다.
성인 대상 문해력 프로인 EBS ‘당신의 문해력+’의 김지원 PD는 한 인터뷰에서 어휘력보다 ‘귀차니즘’과 ‘대충 읽기’에 주목했다. 인터넷 뉴스 댓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본문은커녕 제목만, 아니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않고 예단한 댓글, 독해력 자체가 의심스러운 댓글이 많다.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기보다 ‘답정너’식 대충 읽기의 결과다(아마도 정치 진영 논리가 그 주된 동인일 것이다). 정보가 넘쳐나고 빠르게 스크롤 하는 훑어보기가 일반화된 디지털 환경일수록 대충 읽기는 강화된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문해력 향상을 강조했지만, 사실 진짜 필요한 문해력은 어려운 단어 몇 개를 더 아는 수준은 아닐 것이다. 가짜뉴스와 진짜 뉴스를 가르며 정보의 신뢰성을 식별하기,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기, 다양한 견해를 접하며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등 디지털 환경에서 진정한 문해력은 바로 미디어 문해력, 미디어 리터러시(literacy)다. 안타깝게도 지난 5월 OECD의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우리 청소년의 디지털 문해력은 최하위권이었다. 디지털 정보의 사실과 의견 식별률도 25.6%로 최하위였다. OECD 평균 식별률 47%에 크게 못 미쳤다. 2018년 녹색소비자연대의 설문조사에서도 우리 국민 5명 중 2명은 진짜 뉴스와 가짜뉴스를 구별하지 못했다. 청소년, 성인을 가릴 것 없는 문제다.
매리언 울프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다시, 책으로』에서 “문해력 저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썼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며 “수준 높은 읽기를 할 수 없는 이들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것인데, 소통 회로가 고장 난 곳에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
덧붙여 수학자가 되기 전 시인을 꿈꿨던,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나 단테의 『신곡』 “전체를 외우다시피 할 만큼 읽었다”는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사례처럼 문해력은 창조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언어를 가진 사람, 제대로 잘 읽는 사람은 힘이 세다.

독서, 한자교육 필요성 못잖게 #미디어 리터러시 키우기 시급 #문해력 저하, 민주주의 위기불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