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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로 꼼수 덮는다"…비대위장 제동에 또 비대위 만드는 與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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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집권당인 국민의힘이 ‘이준석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이준석 전 대표가 신청한 비대위 효력정지 가처분에 대해 서울남부지법이 26일 주호영 비대위원장 직무 집행 정지를 결정한 뒤 국민의힘은 27일 5시간에 걸친 의원총회를 통해 해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당 수습카드로는 ‘당헌 당규 미비 상황 정비와 새 비대위 구성’, ‘권성동 원내대표 거취 판단 보류’ 등 미봉책 수준의 방안들만 제시돼 “사태 해결을 위해선 역부족”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 해결을 위해선 복잡하게 얽힌 현재 ‘고르디우스의 매듭’ 같은 상황을 단칼에 끊을 만한 비책이 필요한데, 리더십 자체가 붕괴된 여당 내부에선 누구도 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끊을 방안으로 대통령실 수뇌부와 여당 내부에서 거론되는 건 권성동 원내대표 사퇴나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핵심 관계자)그룹의 2선 후퇴론이다. 여권 전체가 총체적 난국에 빠졌는데, 자신들은 1%의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여권 핵심층의 태도가 문제라는 지적에서다.

특히 28일 국민의힘에선 조경태·윤상현·김태호 의원 등 권 원내대표 사퇴를 주장하는 중진들의 목소리가 윤 대통령과의 친소관계를 막론하고 빗발쳤다. 또 대통령실 핵심 참모들과 당내 친윤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권 원내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게 윤 대통령의 본심”, “권 원내대표가 물러나는 게 순리”라는 취지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어 권 원내대표의 거취가 이번 파문 수습의 일차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공개 의원총회에 참석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시스

국민의힘 의원들이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공개 의원총회에 참석해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뉴시스

앞서 사태 수습을 위해 열린 27일 의원총회는 여권의 현주소와 능력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여당 의원들은 마라톤 의총 끝에 ▲새 비대위 구성 ▲이 전 대표 추가 징계 촉구 ▲사태 수습 후 권성동 원내대표 거취 재논의 ▲이의신청 및 법적 절차 진행 등 네 가지 사안을 결의했다. 반성이나 갈등 봉합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이준석 축출’에 몰두하는 모양새였다. 자칫 역풍을 부를 수도 있는 이 전 대표 재징계나, 당헌·당규 개정으로 비대위 부활을 노리면서 “꼼수를 꼼수로 덮었다”(초선 의원)는 내부 비판에 부닥쳤다.

의총 분위기도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권 원내대표의 거취를 놓고 “나가라”는 쪽과 “수습이 우선”이라는 의원들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특히 이 전 대표 재징계 촉구를 결의하는 대목에서는 “뼈를 깎는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에 또 이준석 내쫓기 연구냐”(3선 의원)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긴급 의원총회이 비공개로 열리고 있다.  국민의힘은 주말인 27일 의원총회를 열고 법원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직무정지 결정과 관련해 대책을 논의했다. 뉴스1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긴급 의원총회이 비공개로 열리고 있다. 국민의힘은 주말인 27일 의원총회를 열고 법원의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한 직무정지 결정과 관련해 대책을 논의했다. 뉴스1

이 과정에서 감정 섞인 비난이나, 동료 의원 간의 충돌도 빈번했다는 게 복수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이 전 대표가 복귀하면 탈당하겠다”(친윤계 의원)는 발언은 점잖은 편에 속했고, “(성추행)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한 오거돈 전 시장이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이 전 대표보다 더 도덕적이다”(여성 초선 의원)는 비난까지 등장했다.

권 원내대표도 날 선 공세를 피하지 못했다. 권 원내대표가 “이 전 대표를 재징계하기보다는 경고하는 게 어떤가”라는 취지로 말하자, 다른 친윤계 인사들이 “강한 징계를 해야 한다”고 반박하면서 입씨름이 벌어졌다. ‘박수 신경전’도 있었다. 당 상황을 비판한 한 지역구 초선의 발언 직후 몇몇 동료 의원이 손뼉을 치자 친윤계 의원 두 명이 “동조하듯 박수를 치지 말라”고 소리쳤고, “박수도 마음대로 못 치나”라고 반박하면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후문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재징계 촉구 결의를 ‘공개 거수’ 방식으로 한 것을 놓고도 뒷말이 나왔다. 이날 ‘재징계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달라’는 원내대표단의 요구에 참석 의원 70명 중 10명 안팎이 손을 들었다고 한다. 당 4선 의원은 “특정 인사의 거취와 관련된 문제를 익명 투표가 아니라 손들기로 하는 것은 의정 생활하면서 처음 봤다”고 비판했다.

의총 결의문이 미봉책이었다는 비판은 여권 내부에서 하루 만에 터져 나왔다. 당장 권 원내대표의 거취 유보를 두고 의총 이후 중진들이 반기를 들었다. 5선의 조경태 의원은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의총 결정은 당원과 국민을 졸로 보는 것”이라며 “권 원내대표는 이미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사퇴를 촉구했다. “권 원내대표가 물러나는 게 민주주의와 당과 대통령을 살리는 길”(윤상현 4선 의원), “권 원내대표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첫 단추”(김태호 3선 의원)라는 주장도 나왔다.

당 혁신위원장인 최재형 의원은 같은 날 “초가삼간 다 타는 줄 모르고 빈대만 잡으려는 당”이라고 꼬집었다. 유승민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의총 결론은 민심에 정면으로 대드는 한심한 짓”이라고 했다. 또 “2024년 공천 걱정 때문에 대통령과 윤핵관 눈치 볼 것 없다”며 윤 대통령을 향해서도 “비대위 탄생의 원인은 대통령의 ‘내부총질, 체리 따봉’ 문자”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3선의 하태경 의원은 의총 직후 취재진에게 “우리 당 망했다”고 말했다.

비대위원인 엄태영 의원이 “주 위원장이 직무정지인데 비대위에 앉아 있어서 뭐하겠나”라며 불과 임명 12일 만에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자멸 분위기도 읽혔다.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17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의 심문을 마친 후 법원을 빠져나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가 17일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당 비상대책위원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사건의 심문을 마친 후 법원을 빠져나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이 전 대표가 추가 법적 대응을 예고하면서 여당의 내홍은 장기화할 전망이다. 향후 주 위원장을 제외한 다른 비대위원들에게도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검토하고, 새 비대위가 출범하면 또다시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게 이 전 대표 측 입장이다. 이 전 대표 측은 중앙일보에 “법원이 비대위 자체가 무효라는 판단을 내린 이상, 최고위 체제로 돌아가 사퇴한 최고위원 자리를 보궐선거로 채워야 한다”고 밝혔다. 27일 경북 칠곡을 찾아 성묘하고 시민들과 떡볶이를 먹는 등 장외 행보를 이어간 이 전 대표는 이틀째 칠곡에 머물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구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충남 천안 재능교육연구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여당 내 자중지란은 결국 윤석열 정부에게도 부담을 주는 모양새다. 대통령 지지율 추락이 가까스로 진정되고, 국정 동력을 회복해가는 국면에서 여당이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여권 관계자는 “당이 진정되면 대통령실에서 문제가 생기고, 대통령실이 정신을 차리면 당이 문제를 일으키는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지적했다.

집권당이 삐걱대는 사이 9월 1일 정기국회가 코앞에 다가왔다. 한국정치학회장인 임성학 서울시립대 교수는 “국정과제와 민생 법안에 드라이브를 걸기에도 빠듯한 정기국회 직전에 집권당이 수렁에 빠져버린 것은 비극”이라며 “여당이 당 정상화보다 소모전에만 계속해서 몰두한다면 집권당 전체는 물론 정부에까지 화가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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