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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턴산의 계시'는 ‘고통스러운 긴축’…파월·이창용 "금리 올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긴축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8월 티턴산의 계시’는 명확했다. 지난 25~27일(현지시간) 미국 와이오밍주 그랜드티턴 국립공원 내 잭슨홀에서 열린 잭슨홀 미팅이 세계 경제에 내놓은 신탁은 '고통스러운 긴축'이다. '세계 중앙은행 총재 연찬회'인 잭슨홀 미팅은 경기 침체를 감수한 지속적인 금리 인상을 결의하는 장(場)이었다. '잭슨홀 컨센서스'가 긴축이 된 셈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지금은 금리 인상을 중단하거나 멈출 때가 아니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Fed보다 금리 인상을 먼저 종료하기는 힘들다”며 한국도 장기간 금리 인상 기조가 이어질 것을 시사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AFP=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AFP=연합뉴스]

전 세계 투자자의 눈과 귀가 쏠렸던 지난 26일 파월의 연설은 짧고, 명확하고, 직설적이었다. 1301단어, 8분 50초짜리 연설에는 인플레이션이란 표현이 45차례 등장했다. 시장이 기대한 파월 피벗(pivot·입장 선회)은 등장하지 않았다.

파월은 “단 한 번의 월간 물가 지표 개선만으로 물가상승률이 내려갔다고 확신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며 “역사는 (통화) 정책을 조기 완화하면 안 된다고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시장에서는 물가 피크 아웃(정점 통과)과 경기 둔화에 대한 우려가 겹치며 Fed의 긴축이 예상보다 빠르게 종료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퍼져있었지만, 이런 기대에 강력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국제금융센터는 “금리 인상이 종결되더라도 긴축적 수준이 상당 기간 지속할 것임을 시사했다”고 분석했다.

파월은 "지금이 장기 중립금리여도 현재 상황은 금리 인상을 중단하거나 멈출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중립금리는 경기를 둔화시키지도, 물가를 자극하지도 않는 금리 수준이다. 중립금리 이상으로 금리를 올리면 물가는 잡을 수 있지만, 경기 침체가 본격화할 수 있다.

파월이 '인플레 파이터' 본색을 제대로 드러내며, 중앙은행 발 경기 침체도 본격적으로 시작될 전망이다. 파월은 "높은 금리가 가계와 기업에도 일정 부분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며 "물가상승률 축소에 따른 불행한 비용이지만, 물가 안정 복원의 실패는 훨씬 더 큰 고통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오른쪽)과 라엘 브레이너드 Fed 부의장(가운데), 존 윌리엄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왼쪽)이지난 26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제롬 파월 Fed 의장(오른쪽)과 라엘 브레이너드 Fed 부의장(가운데), 존 윌리엄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왼쪽)이지난 26일(현지시간) 잭슨홀 미팅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티턴산의 계시는 한국도 피해갈 수 없을 전망이다. 이 총재는 27일(현지시간)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조윤제 금통위원의 말을 인용해 “한은의 통화정책은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했지만, Fed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은 아니다”며 “Fed의 지속적인 금리 인상은 원화의 평가절하(환율 상승)로 이어져, 한은이 Fed보다 먼저 금리 인상을 종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물가상승률이 4~5%의 높은 수준을 보이는 한 금리 인상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은의 8월 경제전망에 따르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내년 상반기 4.6%에서 하반기 2.9%로 낮아진다. 물가만 본다면 한국의 통화정책 방향 전환은 적어도 내년 상반기는 지나야 한다.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에 인플레 등 직격탄을 맞고 있는 유럽도 긴축의 길을 택했다. 이자벨 슈나벨 유럽중앙은행(ECB) 이사는 “경기 침체에 진입하더라도 우리에게 통화정책 정상화의 길을 계속 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했다. ECB가 0.75%포인트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다만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임금과 물가가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오를 때까지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독자노선을 강조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고통스러운 긴축'이 '잭슨홀 컨센서스'가 된 건 잭슨홀 미팅을 자리 잡게 한 전설적 '인플레 파이터' 폴 볼커(1979~87년) 전 Fed 의장의 교훈 때문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긴축의 칼은 과감하고 크게 휘두르고, 쉽게 넣지 말라는 교훈을 남겼다.

볼커는 오일쇼크 이후 두 자릿수로 치솟던 물가를 잡으려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렸다. 경기 침체라는 희생을 치렀지만 1983년 물가상승률은 3%대로 내려왔다. 전임자인 아서 번즈(1970~78년) 전 Fed 의장이 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금리 인상을 주저하다 10%가 넘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온 것과 정반대 행보다.

파월은 "1980년대 초 볼커가 인플레이션 억제에 성공한 것은 앞서 15년간 물가를 낮추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실패한 뒤에야 나온 것"이라면서 “우리의 목표는 지금 단호하게 행동함으로써 그런 결과를 피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물가를 최대한 빠르게 진정시켜 경착륙은 불가피하더라도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물가 상승)은 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가를 둘러싼 불확실성도 중앙은행이 통화 정책 방향타 전환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물가 상황을 오판해 금리 상승을 멈췄다 다시 물가가 오르면 더 큰 비용을 치를 수 있어서다. Fed는 지난해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란 평가를 했다 곤욕을 치렀다.

이 총재도 인터뷰에서 "만약 금리 인상을 멈췄다 (국제) 유가가 다시 오르면 어떻게 되냐"며 "(유가 상승 등) 외부 충격의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정확한 (금리 인상 중단) 시점을 알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불확실성이 커지며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방망이를 되도록 짧게 잡고 있다. 파월도 9월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 가능성에 대해 “이례적인 큰 폭의 인상이 적절하다고 했다”면서도 “9월 금리 인상 폭은 새롭게 나오는 (물가·고용 등) 데이터를 확인한 뒤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도 향후 금리 인상 폭 등의 전망을 3개월을 뜻하는 ‘당분간’으로 한정했다.

중앙은행 발 긴축 행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라는 시각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현지시간) ‘Fed의 강경 발언은 일시적일 수 있다’는 기사에서 “금리가 공격적으로 오르기 전 인플레는 완화되고 경기는 둔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물가 상승 압력을 키웠던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5달러에서 3.87달러까지 떨어진 점 등이 근거가 됐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28일 ”한국의 금리 인상 정도나 속도가 미국보다 조금 적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며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5~6%로 미국보다는 조금 낮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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