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 비주얼만 비틀지 말고 DNA 나눠야 성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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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18면

‘로저 드뷔’ 니콜라 안드레아타 CEO

명품 시계 브랜드 ‘로저 드뷔’ CEO 니콜라 안드레아타. [사진 로저 드뷔]

명품 시계 브랜드 ‘로저 드뷔’ CEO 니콜라 안드레아타. [사진 로저 드뷔]

2004년 11월 명품 브랜드 샤넬과 펜디의 수장인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저렴한 가격대의 SPA(생산·유통 일체) 브랜드 H&M의 한정판 협업 제품이 론칭된 후 패션업계에서 브랜드와 브랜드, 브랜드와 아티스트간의 협업은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제품에 다른 브랜드의 로고 하나만 달랑 박아넣는 무성의한 협업 디자인들이 난무하면서 그 신선함은 퇴색됐다. 지난 5월 12일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펜디와 베르사체가 협업한 ‘펜다체(Fendace)’ 컬렉션을 보고 오랜만에 눈이 번쩍 뜨였다. 펜디의 디자이너 킴 존스와 베르사체의 디자이너 도나텔라가 서로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어 각각 25벌씩, 총 50벌을 선보였는데 킴 존스는 “협업이라기보다 ‘교환(Swap)’에 가까우며 무엇보다 우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두 디자이너가 서로 다른 브랜드의 DNA를 신중하게 탐색하고 연구해 각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디자인을 탄생시킨 흔적이 역력했다.

펜디와 베르사체의 협업이 동종 간의 새로운 성공 사례를 보여줬다면 스위스 명품 시계 ‘로저 드뷔’와 이탈리아 슈퍼카 브랜드 람보르기니, 타이어 브랜드 피렐리의 협업은 사이즈·구조·용도가 전혀 다른 이종 간의 성공적인 협업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지난 19일 한국을 찾은 로저 드뷔 글로벌 CEO 니콜라 안드레아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람보르기니, 피렐리와의 성공적인 협업 전략 키워드를 묻자 안드레아타 CEO는 ‘혁신’과 ‘포용력’을 꼽았다. “2017년부터 각사의 R&D팀이 분기별로 만나 함께 연구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디자인팀뿐만 아니라 기술 파트 엔지니어, 소재개발 담당자들까지 모두 모인다. 우리가 하려는 협업은 단순히 비주얼만 비트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시계와 자동차는 케이스와 심장(엔진과 무브먼트)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서로의 DNA를 면밀히 연구하고 있다.”

로저 드뷔와 람보르기니 R&D팀은 슈퍼카 우라칸과 디자인·소재·기술 면에서 DNA가 같은 시계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우라칸 MB’를 만들었다. [사진 로저 드뷔]

로저 드뷔와 람보르기니 R&D팀은 슈퍼카 우라칸과 디자인·소재·기술 면에서 DNA가 같은 시계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우라칸 MB’를 만들었다. [사진 로저 드뷔]

로저 드뷔와 람보르기니, 피렐리의 협업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 모터스포츠 광팬들을 위해 고도의 기술력과 탁월한 미감을 얹어 아주 비싼 장난감을 만드는 일이다. ‘트랙에서 손목까지’. 로저 드뷔와 람보르기니의 협업 모토다.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우라칸 MB(이하 우라칸 MB)’는 람보르기니 슈퍼카 우라칸에서 따온 이름이다. 우라칸의 유명한 벌집 모양과 육각 대시보드를 우라칸 MB 시계 디자인에 반영했고, 뒷면 세미 스켈레톤(시계 내부의 무브먼트와 장치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계)의 무브먼트는 우라칸 바퀴 테의 속도와 같은 효과를 재현했다. 우라칸 MB의 케이스와 베젤에는 카본과 티타늄이 사용됐다. 슈퍼카의 공기 역학에서 영감을 얻은 소재들로 시계에 극강의 경량과 내구성을 구현한 것이다.

모터스포츠에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피드 스톱’ 장면을 형상화한 피렐리와의 협업 제품. [사진 로저 드뷔]

모터스포츠에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피드 스톱’ 장면을 형상화한 피렐리와의 협업 제품. [사진 로저 드뷔]

피렐리와 협업한 제품 ‘엑스칼리버 스파이더 피렐리’ 스토리는 더 흥미롭다. 이 제품은 스트랩·크라운·베젤을 단 한 번의 클릭으로 모두 교체할 수 있다. 이는 모터스포츠의 유명한 ‘피트 스톱’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경기 중 차량이 연료 충전, 타이어 교체, 장비 점검을 하기 위해 피트에 들어오면 여러 명의 스태프들이 곧바로 달려들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단 몇 초로 승리를 가르기 때문이다. 모터스포츠 광팬들이 이 제품에 더 열광하는 이유는 실제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한 타이어로 시계 스트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아타 CEO는 “실제로 로저 드뷔 고객과 모터스포츠 팬들이 일치할 때가 많다”고 했다. “심장이 뛰고, 아스팔트가 작열하며, 바퀴가 절규하는 모터스포츠의 짜릿한 세계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기자)’을 외치며 최고의 순간을 쫓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최고, 그 너머 극상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파트너가 바로 로저 드뷔다.”

슈퍼카, 아티스트 협업 제품에서 알 수 있듯 로저 드뷔는 전 과정을 정교한 수작업으로만 완성시킨다. 그래서 희소가치가 높지만, 언제까지 디지털의 장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그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코로나19로 인해 디지털 혁신은 더욱 가속화됐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삶이 디지털만으로 충분할까? 럭셔리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단어는 ‘피지털(physical·물리적+디지털)이다. 디지털로 수많은 삶의 여정을 이어가지만 결국 인간은 오감을 이용하는 물리적 체험이 있어야 궁극의 행복을 느낀다는 말이다.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물리적이고 아날로그적인 체험은 갈수록 더 신선하고 흥미로운 대상이 될 것이다. 그 시장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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