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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 돌보는 관대한 조부모, 문제행동 땐 엄격 훈육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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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24면

[천근아의 세상 속 아이들] 황혼 육아

상현이가 병원을 처음 찾은 것은 초등학교 1학년 가을 무렵이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에게 반항적이고 매사에 산만하다는 지적을 받은 것이다. 외래 첫날 상현이를 데리고 온 분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묵례했지만 할아버지는 다소 화가 난 표정이었다. 상현이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돌아다니기 바빴다. 책장에 꽂힌 책들과 벽에 걸린 그림, 장난감들을 살피고 만져보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부모·자녀간 원칙 훼손 않게 주의를

황혼 육아

황혼 육아

“상현아, 선생님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할머니가 상현이를 향해 부드럽게 요청했다.

“안녕하세요…. 됐죠?” 상현이는 건성으로 인사한 후 할머니에게 눈을 흘기며 반항적으로 말했다.

“너! 무슨 말버릇이야? 어서 의자에 앉아!!” 대기실에서부터 정신없이 부산했던 아이를 제지하느라 진이 빠지고 화가 났던 할아버지가 급기야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의 큰 꾸지람에 화들짝 놀란 상현이가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진료실 안에 신기한 게 많지? 선생님하고 이야기하고 나면 다시 살펴보게 해줄게.” 나는 아이가 의기소침해졌을까 우려되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뭐 별거 없는데요? 안 봐도 돼요.” 아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또또! 버릇없이…. 쯧쯧. 죄송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하며 키웠나 보네요.”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하소연했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가 아이의 이런 행동 때문입니다.” 할머니가 다급히 내가 있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꺼냈다.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상현이에게, ‘똑바로 앉자’라고 하면 ‘싫어요!’라고 하고, 쉬는 시간에 지나가다 친구들 책상 위 물건 툭툭 건드리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장난치고….휴….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네요.”

“그런데, 언제부터 조부모님께서 아이 양육을 도맡아 하시게 되었나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동안의 양육 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아기 때부터 우리가 키운 셈입니다. 애 엄마가 상현이 낳고 산후 우울증이 심각해서 입원까지 했는데 결국 아이 돌 지나자마자 애를 두고 아예 친정으로 가버렸어요. 사실상 별거 상태로 몇 년을 지내다 작년에 법적으로 이혼했습니다.” 할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상현이 아빠는 아주 바쁘신가요? 양육에 전혀 관여를 안 하시는지요?” 내가 물었다.

“아들이 야근도 많고 회사에서 말단 직원이라 아이를 직접 돌볼 형편이 안돼서 상현이는 저희랑 살고 있습니다. 아들은 주말마다 애 보러 우리 집에 와서 지내다 가구요.”

“아빠는 상현이가 소아정신과에 방문한 사실은 알고 있나요? 동의는 하셨나요?”

“그럼요. 처음에는 남자애들이 어릴 때 다 저런 거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학교에서 문제가 자주 생기니까 아들도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상냥했고 조리 있게 말씀을 잘하셨다. 반면, 할아버지는 계속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계셨다. 안색도 좀 좋지 않았다.

“어르신,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할아버지를 향해 내가 물었다.

“실은 남편이 작년에 혈액암 진단을 받고 현재 항암치료 중입니다. 이 병원 다녀요.” 할아버지가 주춤하시는 사이 할머니가 먼저 설명하셨다.

소아정신과 외래에는 상현이와 같이 조부모가 보호자로 동반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상현이 가정처럼 편부 또는 편모가정에서 조부모가 관여해서 적극적으로 양육하는 경우가 있지만, 맞벌이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평일에만 육아를 도와주는 가정도 있다. 같이 일하는 후배 의사 부부 중에도 조부모가 육아를 도와주는 경우가 흔하다. 며칠 전(지난 18일) 서울시는 조부모 등 4촌 이내 가까운 친인척에게 0~3세 아이를 월 40시간 이상 맡기는 경우 아이 1명당 월 30만원의 돌봄 수당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정책의 찬반에 대한 의견은 있지만, 논외로 하겠다. 다만, 우리나라의 통계를 보면 상당 부분 조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18년도 보건복지부의 아동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양육 지원을 받는 경우 가정 중 조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83.6%로 가장 높았다. 특히 자식과 따로 사는 외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경우도 50% 가까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조부모 육아’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부모 육아에는 5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관대한’ 유형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들을 때 연상되는 유형이다. 이런 조부모님은 일반적으로 중요한 의사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여전히 부모와 자녀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필요할 때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부모와 손주 사이의 관계를 장려함으로써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유형이다. 대체로 손주들에게 관대하지만, 부모의 규칙을 따르고 존중한다.

둘째는 ‘부모의 대리인’ 유형이다. 사례 속 상현이 조부모의 경우이다. 전형적인 조부모 역할 이상으로 손주에게 훈육과 규칙을 적용하는 부담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 상현이 같이 행동문제가 있는 손자라면 더욱 어려움이 많다. 특히, 상현이 할아버지는 암 투병을 하고 있기에 할머니도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다. 조부모의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부의 사회적 지원이 가장 절실한 조손가정 형태이다.

셋째는 ‘거리감이 있는’ 유형이다. 이 유형의 조부모는 손주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며, 명절이나 가족 행사와 같은 특별한 기간에만 나타난다. 노후에도 쉼 없이 활동하는 조부모이거나 생계에 종사해야 하는 젊은 조부모인 경우가 많다.

넷째는 ‘재미 추구’ 유형이다. 이런 조부모들은 손주들과 보내는 시간 내내 논다. 늘 손주들과 즐거운 나들이나 여행을 계획하고, 손주들도 조부모와 있으면 항상 즐겁게 지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유형의 조부모는 부모가 자녀와 정해둔 약속이나 원칙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 유형은 ‘지혜를 주는’ 조부모이다. 할아버지들이 주로 이 역할을 한다. 이런 유형의 조부모는 부모인 자녀들에게도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고 가족 구성원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려 애쓴다. 심지어 다 성장한 손주들을 통제하려고도 한다. 이 유형의 조부모는 부모-자녀 관계에서 직접 다뤄져야 할 문제까지 개입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손주들 성장·발전 보며 만족감 느껴

그렇다면 조부모 육아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우선 단점부터 살펴보자. 1) 조부모가 법적으로 친권자가 아니어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 2) 경제적 어려움, 3) 손주 훈육 문제, 4) 고령과 심신 건강 문제, 5) 사회적 고립감, 6) 손주의 부모와의 갈등이다. 상현이 사례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육에 대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관대하고 다정하지만, 할아버지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우울증까지 겹쳐 상현이에게 늘 화를 내고 엄격했다. 아이를 대하는 두 분의 방식이 상반됐다. 가정 내 훈육 방식을 일관되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할머니에게는 아이의 문제행동에 단호한 태도를, 할아버지에게는 아이의 사소한 잘못에 너그러운 태도를 주문했다. 조부모는 아들에게 양가감정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손주에게 무책임하고 회피적인 모습에 화가 난 것이다. 아빠가 상현이 양육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도록 권고했다.

조부모가 손주를 키우는 가정의 장점도 많다. 아이들의 회복력이 높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다. 상현이 할머니는 비록 힘은 들지만, 손자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어떤 조부모들은 힘든 처지의 부모를 대신해 손주들의 삶이 더 나아지게 한다면 그 자체가 기쁨이자 보람이라고 말한다. 조부모 가정에서 자란 손주들이 더 안정적이고 대가족 구성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동체 유대감을 잘 느낄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상현이는 현재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매번 아빠와 함께 병원에 온다. 할머니는 가끔씩  따라오시고 할아버지도 건강해지셨다. 이제 상현이에 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은 아빠가 내린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 자폐연구센터 객원교수 역임.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홍보이사로 활동중이다.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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