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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금융시장 출렁…‘세계 경제 대통령’ 파월의 입 주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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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06면

“소방차도 교차로에선 속도를 줄인다.”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지난 5월 24일(현지시간) 연설 직후 기자회견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인플레이션을 진화하기 위해 급하게 출동하고 있는 중앙은행이라 해도, 경제 상황이 변곡점을 맞이할 땐 주변을 둘러보고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얘기다. 라파엘 총재뿐만 아니라 당시 다양한 인사들이 비슷한 발언을 내놓은 바 있다. 물가가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전쟁과 공급망 차질 등으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던 경제 상황도 신경 써야 하는 중앙은행의 고충이 담긴 발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원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이 같은 발언은 그러나 시장에서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 속도조절론’으로 해석되며,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신호를 줬다. 3월 베이비스텝(기준 금리 0.25%포인트 인상)과 5월 초 빅스텝(기준 금리 0.50%포인트 인상)으로 연초 이후 28.9%나 하락했던 나스닥 지수는 5월 24일을 기점으로 속도조절론이 확산하며 반등에 성공해 6월 2일까지 9.3% 상승했다. 그러나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준은 오히려 자이언트스텝(기준 금리 0.75%포인트 인상)을 밟으며 금리 인상에 속도를 냈다. 이에 6월 FOMC 직후인 지난 6월 16일 나스닥 지수는 2주 만에 13.6% 하락하며 연저점(1만646.10)을 찍었다.

돌이켜 보면, ‘자이언트스텝’ 신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물가는 치솟는데, 경기 침체 우려도 커지는 까닭에 연준 내에서도 매파(통화 긴축)적 목소리와 비둘기파(통화 완화)적 발언이 동시에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물가 상승 대응에 실기(失期)한 탓에 연준을 향한 시장의 신뢰가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선 지난 18일 “월가의 투자자들이 연준의 금리 인상 의지가 ‘블러핑’(엄포)이라는 데 베팅하고 있다”며 “인플레이션 예측에 자신 없어 보이는 연준의 모습 때문에 언제 금리 인상을 중단할 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라고 분석했다.

시장의 오해는 중앙은행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잘못된 해석이 퍼질 경우,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선 한 달 전 판단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교차로에 섰기에 좌우를 살펴야 하는 상황인데, 문제는 이 같은 ‘신중함’이 감속 신호로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 7월 FOMC 회의 이후 앞으론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안내)를 제시하지 않기로 했다. 금리 인상을 미리 시사하지 않는 식으로 잘못된 해석을 피해가겠다는 의도다. 이를 두고 골드만삭스는 보고서를 통해 “연준이 강력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선택권을 열어두려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경제 대통령’인 연준 의장의 입을 더욱 주목해야 하는 상황이 된 셈이다. 이 때문에 최근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열린 잭슨홀 미팅은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았다. 잭슨홀 미팅은 각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학자 등 150여 명이 참석해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인데, 과거 연준 의장들은 모두 이 자리에서 세계 경제 흐름을 바꾸는 발언을 내놓곤 했다. 뉴욕타임즈(NYT)는 이번 잭슨홀 미팅을 두고 “최근 인플레이션에 대한 중앙은행의 시각과 금리 전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고 평가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베이비스텝을 단행한 이후 포워드 가이던스를 재확인한 한국은 어떨까.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하지 않기로 파월 의장과는 정반대의 행보인 셈인데, 시장에선 그러나 이 총재나 파월 의장의 의도는 결국 동일하다고 입을 모은다.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8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 직후 이 총재는 “연말 이후에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투자자들은 스스로의 책임 아래 손실이나 이익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내년에는 물가가 꺾이며 금리 인상 속도가 둔화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퍼지자 내놓은 발언인데, 이로 인해 채권시장이 술렁이기도 했다.

이 총재는 그러나 내년 이후의 정책 방향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이런 상황에서 힌트를 얻을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결국 미국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총재도 최근 “(한국은행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만, 연준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미국 연준의 행보가 일종의 가이던스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연준 역시 교차로에 선 시점이라 이번 잭슨홀 미팅 이후에도 당분간 파월 의장의 발언에 전 세계가 주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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