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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만명 봉화군에 ‘베트남 마을’ 만드는 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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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면

지난 17일 박현국 봉화군수(왼쪽)와 응우옌 부 퉁 주한베트남대사가 만났다. [사진 봉화군]

지난 17일 박현국 봉화군수(왼쪽)와 응우옌 부 퉁 주한베트남대사가 만났다. [사진 봉화군]

지난 17일 서울시 종로구 주한베트남대사관. 응우옌 부 퉁 주한베트남대사와 박현국 경북 봉화군수가 양국 국기와 아세안(ASEAN) 상징 깃발을 배경에 두고 마주 앉았다. 서로 안부를 나누다 박 군수가 꺼낸 이야기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건. 올해가 대한민국-베트남 수교 30주년인 만큼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이 국가 정책사업에 채택될 수 있도록 힘을 합쳐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은 베트남에서 직선거리로 3000㎞ 이상 떨어져 있다. 이렇게 멀리 있는 한국에서 인구가 3만 명 남짓한 소도시인 경북 봉화군이 베트남마을을 만들기로 한 이유는 뭘까.

경북 봉화군과 베트남의 관계를 찾기 위해선 12세기 베트남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베트남 국명이 대월(大越)이었던 시기에 제6대 황제 영종의 7남 이용상(1174~?·李龍祥·베트남어로 리롱떵)이 태어났다. 베트남 최초의 통일왕조이자 장기집권 왕조인 리(Ly) 왕조(1009~1225)가 쇠퇴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이용상 조카인 혜종이 제8대 황제에 오른 뒤인 1210년, 왕조의 외척이었던 진수도(1194~1264·陳守度)가 국정을 위임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 리 왕조 몰락의 시작점이었다. 진수도는 혜종의 딸을 임금에 앉힌 뒤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키고 왕위를 남편에게 넘기도록 하는 방식으로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왕조가 이씨에서 진씨로 넘어가자 대규모 살육이 이뤄지고, 이씨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멸족을 당했다.

이용상은 숙청에서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1226년 이용상은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포에 이르렀다. 베트남 왕자가 표류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 조정에선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화산 이씨(花山 李氏) 성씨도 조정이 하사했다.

화산 이씨 시조가 된 이용상의 둘째 아들인 이일청이 안동부사로 부임하면서 후손들이 안동과 봉화 일원에서 세거지를 이루고 살았다.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도 화산 이씨의 세거지 중 하나다. 이곳에는 이용상의 13세손인 이장발(1574~92)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충효당이 있다. 이장발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 어린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혈전 끝에 생을 달리한 인물이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66호로,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八作) 기와집이다. 충효당 인근엔 화산 이씨 후손 10여 명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봉화군이 베트남마을을 조성하려는 곳도 충효당 일대다. 3만8350㎡ 규모 부지에 베트남 전통 마을과 리 왕조 유적지 재현 공간, 연수·숙박시설 등을 조성해 충효당을 관광 명소화하는 목적이다.

2018년 1월에도 당시 응우옌 부 뚜 주한베트남대사가 한국에 흩어져 있는 베트남 선조의 흔적을 찾는 일정을 봉화군과 영주시에서 진행했다. 당시 응우옌 대사는 봉화 충효당을 가장 먼저 찾았다. 박 군수는 “베트남마을을 조성하면 연간 10만 명의 관광객 유치로 연 37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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