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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기업 미 증시서 상폐 러시, 10조 투자 국민연금 괜찮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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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호 06면

미·중 금융전쟁 파장

지난 7월 뉴욕증시 상장폐지 명단에 이름 올린 알리바바그룹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7월 뉴욕증시 상장폐지 명단에 이름 올린 알리바바그룹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162곳.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외국기업책임법(HFCAA)을 근거로 지정하는 상장폐지 명단에 이름 올린 중국 기업의 숫자다. 뉴욕 증시에 상장(ADR)된 중국 기업은 270곳. 3곳 중 2곳은 상장폐지 대상이란 얘기다. 미국 증시에 상장한 모든 외국 기업이 HFCAA 적용 대상이지만, 전 세계에서 미국의 감독을 거부하는 나라는 중국뿐이어서 162곳 모두 중국 기업이다. 이 때문에 HFCAA가 국회 문턱을 넘은 2020년 말 사실상 미·중 금융전쟁의 신호탄이란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퇴출 명단엔 쟁쟁한 중국 기업들이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다. 중국 최대 검색 포털이자 인공지능 업체인 바이두는 지난 3월 23일 이 명단에 포함됐다. 지난 5월 5일엔 세계2위 ‘석유 공룡’ 시노펙이 지정됐다.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3주가량 소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뒤, 확정 명단에 포함된다. 다만, 현재까지 소명을 통해 명단에서 제외된 기업은 없다. 오히려 지난 12일(현지시간) 시노펙과 시노펙 상하이, 페트로차이나, 중국알루미늄, 중국생명 등 5개 기업은 SEC에 자진해서 상장폐지를 통보했다. 이들 기업들은 “뉴욕증시 상장 유지 의무를 지키기 위한 부담이 크다”며 “오는 25일까지 상장폐지 신청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11조 중국펀드 투자 중학개미도 불안

중국 기업들이 언급한 상장 유지 의무는 회계감독권을 뜻한다. 미·중 양국은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회계 감독권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을 벌였다. HFCAA에선 미국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회(PCAOB)가 3년 연속 회계 감사 자료를 심사할 수 없을 경우 증시에서 강제 퇴출시키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 기업들과 중국 정부는 회계 자료 제공을 거부했다. 회계 자료를 통해 민감한 정보가 PCAOB에 넘어갈 것이라 우려한 것이다. 반면 PCAOB는 “뉴욕 증시에 상장된 모든 기업들의 회계 감사 자료를 확인하는데, 중국 기업만 예외를 허용해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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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중국 기업들의 상장폐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중국 정부는 지난 4월 자국 규정을 고치면서 전향적인 자세를 내비치기도 했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 규정에는 ‘해외 상장된 중국 기업에 대한 현장 검사는 중국의 감독·관리 기구를 중심으로 이뤄지거나, 중국 감독·관리 기구의 검사 결과에 의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를 삭제하기로 한 것이다. 류허(劉鶴) 중국 국무원 부총리도 “미국 상장 중국 주식 문제와 관련해 양국 감독 기구 간 양호한 소통이 진행되고 있고,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내놓을 때까지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국유기업의 자진 상장폐지로 급변했다. 여기선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미·중 양국 간 갈등이 깊어지자, 중국정부가 국유기업을 자진 철수시킨 것이란 해석이 무게가 실린다. 예컨대 중국 국영 석유기업 시노펙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산 원유를 들여오고 있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지난 6월 월스트릿저널(WSJ)은 “중국 시노펙이 자회사 유니펙을 통해 러시아산 석유를 해상 환적하는 식으로 옮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시노펙이 회계 감사 자료를 미국에 공개하면 미국에 제재 대상이 될 빌미를 줄 여지가 있어 회계감사권 협상이 불가능할 것이란 얘기다.

중국 기업의 뉴욕증시 이탈 행보는 국유기업에 그치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중국 정부는 국유기업이 아니더라도 민감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미국 증시 철수를 압박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번 국유기업의 상장폐지 통보 이전인 지난해 10월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한 차량 호출 플랫폼 디디추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 때문에 웨이보와 바이두 등 상장폐지 명단에 포함된 다른 플랫폼 기업들도 상장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루이 리우 KPMG중국 파트너는 “미국과 중국 정부가 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더 많은 업체들이 미국에서 상장폐지를 선택하고 귀국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들의 뉴욕 증시 이탈이 본격화할 경우 투자자들은 어떻게 될까. 일단 중국 기업 주식 대부분은 홍콩거래소에서 거래될 전망이다. 상장폐지 명단에 오른 기업 대다수가 홍콩 또는 중국 본토에 상장한 상태다. 중국 증시는 외국인이 거래가능한 주식과 그렇지 못한 주식으로 복잡하게 구분돼 있는데, 홍콩 증시는 외국인에게 개방된 시장이다. 박승찬 중국경영연구소장(용인대 교수)은 “상하이와 선전, 홍콩, 베이징 등 중국 내 증권거래 시장을 합치면 이미 규모가 굉장히 크다”며 “중국 정부 생각은 본토 시장을 미국에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키우는 것인데, 당장은 외국 자본이 본토로 들어오는 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중국 주식에 투자한 국내 투자자들이다. 뉴욕 증시가 하루 평균 거래량이 916억 달러(약 120조원)에 달하는 전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인 탓에 뉴욕증시에서 상장폐지된 기업들은 주가에 악영향을 피하긴 어렵다는 게 금융투자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뉴욕 증시에서 퇴출됐다는 소식은 투자자들에게 부정적인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3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상장폐지 명단을 공개하자 해당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는 모습이 관측되기도 했다. 전종규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3월 명단 공개 이후 상장폐지가 현실화될 것을 우려한 헤지펀드들을 중심으로 매도 주문이 나왔다”며 “최근 대만 문제가 불거지면서 미·중 갈등 수위가 올라간 것은 분명하니, 미·중 양국간 경제적 디커플링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헤지펀드들, 상폐 우려해 매도 주문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도 중국 주식 투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타격받은 2020년을 제외하면 매년 경제성장률 6%대 이상 고성장을 기록하면서 국내에서도 투자자들이 몰린 바 있다. 국내 대표 기관 투자자인 국민연금만 하더라도 지난해 기준 9조8502억원을 중국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 상장폐지 명단에 포함된 기업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 보유 잔액이 1조133억원에 달하는 알리바바그룹은 지난 7월 29일 미국 증시 상장폐지 명단에 이름 올렸다. 알리바바그룹 주가는 최근 한 달간 13.04% 하락했다.

시노펙과 페트로차이나, 중국알루미늄, 중국생명 등 자진 상장폐지를 통보한 기업들 역시 국민연금 투자 목록에 포함된 기업들이다. 바이두와 중국공상은행 등 상장폐지 명단에 포함된 기업도 지난해말 기준 각각 1523억원, 1200억원 어치를 들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현재 중국 기업 투자와 관련해 세부적인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면서도 “운용자산이 900조원에 달하기 때문에 기금운용지침에 맞춰 자산을 배분해 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운용지침이 정해져 있다보니, 국민연금 입장에선 단기적으로 부정적 이벤트가 발생해도 일일이 대응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전문가들은 탄력적 운용의 폭을 넓혀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거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근무했던 한 금융시장 관계자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에서 전략적 자산 배분 비율을 정하면, 기금운용본부는 전술적자산배분(TAA) 상 허용 범위인 2%포인트 내외에서만 비중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며 “이걸 바꾸려면 워낙 시간이 오래걸리는 탓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게 사실인데, 허용범위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학개미(중국 주식 투자에 나선 개인)들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 1조5000억원이 몰리면서 6월 말 기준 국내 중국 주식형 펀드의 잔고는 11조300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미국 증시 상장폐지 명단이 발표된 3월 국내 178개 중국펀드 수익률은 -9.39%였고, 4월에도 -9.65%를 기록했다. 펀드평가업체 한국펀드평가에 따르면 5월에는 2.52% 수익을 낸 것으로 집계됐으나, 하반기 들어서면서 다시 위기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적립식으로 중국 펀드에 투자하고 있다는 직장인 이호준(40)씨는 “미·중 갈등이 꺼림직했지만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것이란 점에 끌려 지난해 말부터 투자를 시작했는데, 최근 들어 수익률이 신통찮다”며 “최근에 나오는 소식들도 긍정적인 얘기가 없어 투자금 회수를 매일밤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러나 당장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3월 명단이 처음 공개됐을 때 중국 기업들의 주가가 조정을 받았기 때문에 당장 손실을 보면서 팔아치우는 건 손해라는 얘기다. 더구나 중국 기업들이 자진해서 상장폐지에 나서지 않는다면, 2024년부터 상장폐지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 사이 대응할 시간도 충분하다는 조언이다. 최원석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유예기간이 있기 때문에 중국기업들이 당장 미국 증시에서 상장폐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대기하고 있어 정치적 압박 카드로 활용하는 부분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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