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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스타트업은 진화 중… 망할 기업은 망하게 내버려 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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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창업의 길 (28) 미래과학기술지주

김판건 미래과학기술지주 대표가 지난 9일 오후 대전 KAIST 문지캠퍼스 내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인터뷰 뒤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김판건 미래과학기술지주 대표가 지난 9일 오후 대전 KAIST 문지캠퍼스 내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나 인터뷰 뒤 포즈를 취했다. 프리랜서 김성태

대학의 역할이 진화하고 있다. 대학의 시작이 교육이었다면, 근대에 접어들면서 연구의 기능이 더해졌고, 최근엔 창업기지의 역할이 보태지고 있다. 세계 정상의 ‘창업국가’이스라엘의 경우 테크니언공대 등 주요대학들은 모두 기술지주회사를 두고 있다. 대학이 세계 정상 수준의 R&D를 바탕으로 국가의 신성장 엔진을 찾아 길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대학도 이제 혁신기술에 기반한 창업의 싹이 자라고 있다.  미래과학기술지주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 국내 4개 과기특성화대학이 주축이 돼 설립한 기술사업화 전문회사다. 이들 대학의 연구성과를 직접 사업화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4년 만들어졌다. 일종의 창업보육센터 겸 벤처캐피털의 역할을 겸하는 기능이다.

국내 대학ㆍ연구소의 기술지주회사는 적지 않다. 2008년 한양대를 시작으로 현재 80여 개의 기술지주회사가 있다. 이름뿐인 기술지주회사가 많은 게 국내 대학의 현실이지만, 미래기술지주는 이중 누적이익 기준 국내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술지주회사다. 설립 후 8년여의 짧은 기간이지만 지금까지 83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등 한국 기술사업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대박’을 터뜨린 곳은 없지만, 이중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박종화 교수가 창업한 바이오기업 클리노믹스는 2020년 12월 기업공개를 통해 코스닥에 상장됐다. KAIST 박사 출신이 창업한 배터리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제조기업 스탠다드에너지는 2020년 소프트뱅크벤쳐스로부터 약 100억 원의 투자를 받은 데 이어, 올해 초 롯데케미칼로부터 약 650억 원을 투자 받았다. 내년 말 기업공개 목표를 세워두고  있다.
지난 9일 대전 KAIST 문지캠퍼스에 자리잡은 미래과학기술지주의 김판건(57)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미국과 한국에서 수차례 창업을 한, 1세대 벤처기업인 출신이다.  과학기술일자리진흥원 기술사업화 단장(2014~2016)을 거쳐 2017년부터 미래과학기술지주를 이끌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내 대부분 기술지주회사들의 실적이 좋지 못한데, 미래과학기술지주의 비결은 뭔가.
우리는 KAIST를 비롯, 4대 과기원 기술로 창업한 곳에 투자한다. 최근 4대 과기원에서 나오는 기술들 중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뛰어난 기술들이 적지않다. 당연히 투자해서 성공할 확률이 다른 곳보다 높은 것 같다. 덕분에 올해가 기술지주 창업 후 9년째인데 투자한 총 83개 기업의 자산가치가 2조원에 달한다. 이 중에는 자산가치가 5000억원에 이르는 기업도 있다. 투자 회수도 많이 해서 선순환이 잘 이뤄지고 있다.  
미래과학기술지주에 기술사업화 전문가들이 있나.
직원이 11명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모든 분야의 전문가일 수는 없다. 대신 공인회계사(CPA)나 변호사를 외주기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 각 대학의 기술사업화 조직들이 있다. 학교엔 공인회계사나 변호사ㆍ변리사 같은 전문가들도 있다. 이 분들의 도움을 받는다. 국제학술지에 실린 교수들의 연구논문을 보고 투자 기업을 찾는 경우도 있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게재된 논문이라면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업적인 부분만 많이 찾아서 검토를 하는 편이다.
지난해 9월 당시 박기영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오른쪽 두 번째)이 ESS, 전기충전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대전시 에너지혁신기업 스탠다드에너지를 방문해 주요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미래과학기술지주가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사진 산업통상자원부]

지난해 9월 당시 박기영 산업통상자원부 2차관(오른쪽 두 번째)이 ESS, 전기충전시스템 등을 개발하는 대전시 에너지혁신기업 스탠다드에너지를 방문해 주요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스탠다드에너지는 미래과학기술지주가 투자한 스타트업이다. [사진 산업통상자원부]

어떤 성격의 기업에 투자하나.
비즈니스 모델로 창업한 회사가 아니라 특허가 기본으로 깔려 있는 딥테크 기업이 대상이다. 민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말랑말랑한’ 비즈니스 모델 중심의 투자는 서울 중심으로 이미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딥테크 기업은 투자가 잘 안됐다.  딥테크 스타트업은 기본적으로 유니콘 기업(상장전 기업가치 1조원이 되는 기업)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 대기업과 그 협력업체를 제외하고는 국내 B2B(기업간거래) 시장이 적은 탓이다. M&A(인수 및 합병) 환경도 아주 열악하다. 한국은 대기업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시장이라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제품을 안 사면 팔 곳이 없다. 그러니 M&A 때 스타트업 가치도 지나치게 평가절하되는 측면이 있다.  
왜 딥테크 기업인가.
국내 유니콘기업의 대부분이 B2C(기업과 소비자간 거래) 기업이다. 이런 시장은 대부분 제로섬 게임이다. 최근 뜨고 있는 배송업의 경우 한 배송업체가 성장하면 다른 배송업체가 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걸려있는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B2B 형태의 팁테크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다. 이런 기업이 좀 더 커지면 세계로 진출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국내 유니콘 기업 현황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중소벤처기업부 업계]

국내 유니콘 기업 현황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중소벤처기업부 업계]

국내 딥테크 창업을 냉정하게 진단하자면.
지금까지 국내에서 대기업을 받쳐주는 기업들은 중견ㆍ중소 협력업체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또는 공공 R&D를 통해 뛰어난 기술을 확보해왔는데, 그건 패스트 팔로워 (fast followerㆍ빠른 추격자)시대에만 통할 수 있다.  이제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ㆍ선도자)형 딥테크 스타트업들을 통해 기업들이 성장할 시기가 됐다. 사실 국내 딥테크 스타트업 중에는 아직 세상을 혁신할 만한 어떤 기술도 나온 적이 없다. 그렇다고 너무 비관에 빠질 일은 아니다.  아직  덩치 큰 기업이 아직 없긴 하지만 나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래과학기술지주의 롤모델이 있다면 어떤 건가.  
학교 쪽이라면 사실 중국 칭화대(淸華大)나 미국 MIT 같은 곳에서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제일 중요한 건 스타트업 커뮤니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다. 미국 실리콘밸리에는 대학교수와 학생, 스타트업ㆍ벤처캐피털 등이 한군데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저녁이면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새로운 창업을 꿈꾸고 해법을 찾아내는 커뮤니티가 잘 형성돼 있다.  
경기도 판교나 대전 대덕이 그런 곳 아닌가.
판교는 최근 바이오 벤처들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B2C기업들이 대부분이다. 대덕도 곳곳에 스타트업ㆍ벤처기업들이 많지만 학교나 출연연을 중심으로 뿔뿔이 흩어져있다. 출연연에 있는 스타트업 한번 만나려면 출입증을 받아서 입구에서 20~30분을 걸어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커뮤니티가 될 수 없다.
박종화 UNIST 교수는 국내 최고의 게놈 연구자이면서 UNIST 1호 교원 창업 상장기업이다. [중앙포토]

박종화 UNIST 교수는 국내 최고의 게놈 연구자이면서 UNIST 1호 교원 창업 상장기업이다. [중앙포토]

우리 딥테크 기업들이 더 성장하자면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가 규제 문제다.  법과 규정에 근거해‘○○는 할 수 있다’는 식의 포지티브 규제가 아닌 ‘○○는 할 수 없다’(○○ 빼고는 다 할 수 있다)와 같은 네거티브 방식을 좀 더 확대해서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탠다드에너지의 경우를 봐도 기존에 없던 기술과 방식을 택하니 인증 등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특정 지역에서 자유롭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샌드박스가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딥테크 창업 측면에서 10년 또는 20년 뒤 한국을 전망을 하자면.
미래는 전망이나 예측이 아니라 꿈꾸고 만들어 나가는 거다. 우리나라 사람은 외국에 비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욕구가 굉장히 큰 것 같다. 이게 패스트 팔로워 시대일 때는 너무 좋은 습성이다.  뭔가 목표를 세우고 부지런히 따라가는 방식 말이다. 하지만 목표가 보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할 땐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새로운 산업을 이끌 수 있으려면 새로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 R&D 수준이나 투자 환경은 너무 많이 좋아졌다.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딥테크 기술의 싹들도 적지 않다.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너무 많지만, 1%씩 1%씩 해결하고 전진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에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지원이 능사가 아니다. 정부 R&D 과제를 과감하게 줄이면 좋겠다. 스타트업 중 많은 곳은 일정 시간이 지나 성공하지 못하면 도태돼야 하는데, 정부 과제를 통해 계속 연명한다. 망할 회사는 망해야 거기 있던 직원들이 나와서 새로운 회사로 갈 수 있다. 그러면 새 회사는 망한 회사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노하우가 쌓여 그 위에서 시작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가 그렇다. 스타트업들을 계속 옮겨 다닌다. 그렇게 기술이 쌓이면 예전에 1년씩 걸려 개발하던 것을 3~4개월 만에 개발할 수 있게 된다. 정부가 ‘○○년 생존율’과 같은 목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R&D도 ‘8대 전략육성과제’와 같은 톱다운 방식은 지양하고, 바텀업 방식의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연구자들은 정말 하고 싶은 연구를 할 때 열심히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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