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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정무의 그림세상

예언자 백남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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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피카소가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미술가라면, 20세기 후반은 누가 대표할까. 작품값을 놓고 보면 앤디 워홀이나 데이비드 호크니를 손꼽겠지만, 영향력에선 백남준이 점점 강렬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2019년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 백남준 대규모 회고전을 열면서 작가 소개 동영상을 제작했는데, 여기서 백남준은 미래를 예견하는 천재적 예술가로 등장한다. 세계적인 미술관이 공들여 만든 영상이기에 한번 소개하고자 한다.

‘백남준은 다섯 번씩이나 미래를 예측했다’라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다섯 개의 키워드는 이렇다. ①인터넷 ②비디오 아트 ③기후 위기 ④글로벌 미디어 ⑤스마트폰이다. 이 모든 것을 백남준은 일찍이 예견하면서 작품에 구현하려 했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인터넷·기후위기 등 예견
후배작가에 새 길 열어줘
용인에서 굵직한 회고전
탄생 90주년 재평가 기대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 미켈란젤로의 바티칸 시스틴 성당 벽화를 현대적인 리듬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백남준 아트센터]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은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시스틴 채플’. 미켈란젤로의 바티칸 시스틴 성당 벽화를 현대적인 리듬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백남준 아트센터]

먼저 그가 1974년 제안한 ‘일렉트로닉 슈퍼 하이웨이’는 내용과 형식에서 오늘날의 인터넷인데, 이 시기 인터넷을 예측한 사람은 있지만 백남준만큼 인터넷의 소통 기능을 강조한 예는 없다고 한다. 백남준 하면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수식어를 빼놓을 수 없듯이, 이 영상도 그가 1963년 첫 개인전에서 이미 텔레비전 수상기를 이용한 일련의 작품을 선보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비디오 아트의 신기원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수많은 작가에게 새로운 창작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한다.

이 영상은 백남준이 기후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고 강조하는데, 그가 인간의 ‘브레인 파워’가 ‘오일 파워’를 이겨낼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한 점을 눈여겨본다. ‘TV 정원’ 등을 예로 들며 기술과 자연의 조화를 꿈꾸면서 생태계 속에 테크놀로지를 녹아내려 했다고 말한다.

또 백남준이 1973년 ‘글로벌 그루브’에서 전 지구적 미디어 세계를 꿈꿨으며, 나아가 스마트폰 같은 전화기를 예견했고, 모든 사람이 비디오 아티스트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점을 강조한다. 백남준이 꿈꾼 세계가 오늘날 소셜 미디어 세계와 연결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영상은 끝을 맺는다.

2019년 테이트 모던의 야심찬 전시는 전 세계를 돌면서 백남준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를 불러오려 했다. 하지만 순회지에 한국이 빠져서 아쉬웠고, 곧바로 터진 코로나19 사태로 기대만큼 큰 화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팬데믹이 초래한 또 다른 손실인 셈인데, 다행스럽게 이를 만회하는 듯한 굵직한 전시가 지금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백남준의 ‘칭기즈칸의 복권’. 기마 민족의 기상을 보여준다.

백남준의 ‘칭기즈칸의 복권’. 기마 민족의 기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2019년 테이트 전시의 메인 작품이었던 ‘시스틴 채플’을 볼 수 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 설치된 작품을 복원한 것인데,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채플을 미디어 아트로 재해석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 안에 비계를 설치하고 천장과 벽면에 작업한 것처럼 백남준은 전시장 안에 철골 비계를 설치하고 여기에 비디오 프로젝트 40여 개를 이용해 사방에 영상을 쏟아낸다.

백남준은 영상을 생동하는 생명처럼 다뤘는데, 초 단위로 변하는 영상을 보노라면 어지럽다는 생각보다 현대의 리듬으로 다가온다. 피카소가 붓이 아니라 가위와 풀로 오려 붙이는 콜라주(collage) 기법을 통해 이질감을 현대의 미학으로 받아들이게 했다면, 백남준은 비디오 영상을 이어 붙여 그것을 극한으로 몰아붙인다.

어떤 작가를 평가하려면 먼저 대표작을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백남준의 경우 ‘시스틴 채플’이 기준작이 될 만하다. 평소 백남준이 낯설게 느껴졌다면 ‘시스틴 채플’을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가 재현하려 한 현대문명의 속도와 리듬감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트센터 2층에는 백남준의 대규모 설치작업이, 1층에는 ‘TV 정원’ 등 그의 주요작이 연대기적으로 전시돼 있다. 특히 ‘칭기즈칸의 복권’이 눈에 들어온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등에 메고 말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칭기즈칸을 그려냈는데, 여기 앉아 있는 이가 백남준 자신일 것이다.

백남준은 한국인이라는 점을 항상 의식했다. 자기 핏속에 흐르는 몽골리안 혈통이 예술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말하곤 했다. ‘텔레+비전’의 어원이 ‘멀리+보다’이기에 대초원을 달리는 기마민족이 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고 예견했다. 백남준이 만약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90세다. 탄생 90주년을 맞아 그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대대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고, 그 출발선이 한국이라면 더 신날 것 같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