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이 가져야할 「장인적 소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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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엊그제, 제본 직전에 있던 국판 4백여 페이지 3천 권 분량의 인쇄물을 폐기하였다. 출판업을 한지 14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간적·경제적 손실은 제쳐두고서라도 정신적 충격과 기분의 참담함은 말할 수 없었다. 이전에도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눈에 띌 정도의 잘못을 경험한 바 없지 않았으되 대개는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사단은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책 만들기의 한 과정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그것도 전문 직업인의 불성실과 무책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잘못의 원인은 촬영과정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내가 이만한 일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은 인쇄 도중에 흠을 발견한 나 자신이 인쇄공에게 그 흠을 지적한 바 있고 그 인쇄공 또한 나의 지적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고치지 않은 채 인쇄를 그대로 진행했다는 데에 있다. 4백여 페이지 전체의 촬영에 이상이 생기는 일도 쉽지 않겠지만, 제판 과정에서 기술자의 눈에 라면 당장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잘못이 고쳐지지 않은 채 인쇄기에 오른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당달봉사가 아니라면 비전문가의 눈으로도 곧장 알 수 있는 인쇄 과정에서까지, 그것도 확인까지 한 터에 잘못을 고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출판업을 시작한 70년대 중반을 생각하면 출판업 또한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이미 세계 10대 출판국가가 된 것이다. 종이 소비량의 증가에 걸맞게 인쇄와 제본 시설은 최신의 것이 움직이고 있고 기술수준 또한 전반적으로 상승하였다. 그리고 출판인쇄 노동자의 임금이나 직업적 지위 또한 만족할만한 정도는 되지 않았지만 상승하였다.
내가 하는 이 일이 적어도 사회의 정신적 건강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소박한 목표에 자족하려고 하는 나로서는 그러한 책의 내용적인 가치 말고도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리가 없는 편집에, 고른 인쇄, 오자와 오문이 없는 문장, 깨끗한 감정, 튼튼한 제본, 질이 좀더 좋은 종이로 된 책의 형태적 생산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소망은 한번도 뒤끝이 말쑥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인쇄의 질을, 종이의 질을, 제본의 질을, 오자와 오문의 과다를 탓하지 않는 소비자들의 대범함은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는 미덕이라고 하더라도 책을 만드는 당사자들, 곧 인쇄공, 제본공, 편집교정인, 더구나 제지업자, 인쇄업자, 제본업자, 나를 포함한 출판업자들이 세계 10대 출판국가의 객관적 위상에 알맞지 않는, 책을 만드는 자리와 책임을 통한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구차한 직업적 현실로 하여 나를 애꿎게도 고업의 인연으로 탓하게 하는 출판이 장인적 소명과 전문인으로서의 직업윤리가 반듯하게 서 있지 않은 우리 나라의 문화와 산업과 직업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도서출판 까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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