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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괴짜 KAIST 총장, 샤갈급 스테인드글라스 거장 모신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스테인드글라스 거장 김인중 수사 신부 

 세계적인 재불(在佛) 화가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인 김인중 신부(82)가 지난달 26일 오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 본원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괴짜 총장으로 잘 알려진 이광형 총장은 취임 이후 미술관 건립 등 예술과 과학, 공학을 융합하는 실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세계적인 재불(在佛) 화가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인 김인중 신부(82)가 지난달 26일 오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 본원 작업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괴짜 총장으로 잘 알려진 이광형 총장은 취임 이후 미술관 건립 등 예술과 과학, 공학을 융합하는 실험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섭씨 33도가 넘는 불볕더위가 내리쬐던 지난달 26일 낮,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캠퍼스에 흰색 수사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백발이 된지 오랜 듯한 짧은 머리, 불편한 듯하지만 기품있는 걸음이 범상치 않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수사복에 가려진 허리춤에 나무 십자가가 달려있는 긴 묵주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한여름 진초록 잔디밭을 가로지른 이 남자는 중앙도서관이 자리한 학술문화관 입구로 사라졌다.

KAIST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수사(修士)의 정체는 프랑스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김인중(82) 신부다. 그는 프랑스에서 50년 가까이 작품활동을 해온 세계적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이기도 하다. 프랑스 중남부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 등 세계 50곳 성당이 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한국에도 경기도 용인의 신봉동 성당이 그의 작품을 품고 있다. 세계적 미술사가 겸 수녀인 웬디 베케트(1930~2018)는“만약 천사가 그림을 그린다면 그의 작품과 같을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스위스 일간지 ‘르 마땡(Le Matin)’이 선정한 세계 10대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에 샤갈ㆍ마티스와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김인중 신부가 KAIST 도서관 천창에 만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구상도. [사진 KAIST]

김인중 신부가 KAIST 도서관 천창에 만들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구상도. [사진 KAIST]

예술에서 에너지 얻는 과기특성화대

세계적 거장(巨匠)이 모국으로 돌아와 지난 5월부터 대전 KAIST 학술문화관 1층 구석에 ‘창작실’을 차려놓고, 작품에 열중하고 있다. KAIST 중앙도서관인 학술문화관 3층의 가로 10m, 세로 8m의 천창(天窓)을 53조각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완공 목표일인 내년 3월이 되면 대전 KAIST 도서관은 세계적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의 ‘빛의 예술’이 펼쳐지는 공간이 된다. 지난달 26일 중앙일보 취재진이 찾았을 때 107㎡(약 33평) 남짓한 작업실엔 500호, 300호짜리 초대형 캔버스들이 가득했다. 그 속에는 김 신부 특유의 화려한 색감을 담은 추상화들이 여름 들판 꽃처럼, 파란 하늘 흰 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의 서예붓과 서양의 화구인 나이프로, 또 때로는 스프레이로 ‘천사의 그림’을 그려냈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전사(轉寫)와 추가 수작업을 거쳐 스테인드글라스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행위”라며“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림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을 향한 구도(求道)의 도구인 셈이다.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 중남부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중 일부. [사진 김인중]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 중남부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중 일부. [사진 김인중]

KAIST는 왜, 어떻게 세계적 화가인 김인중 수사 신부를 미술대학도 종교학과도 없는 과기특성화대학으로 모셨을까. KAIST는 지난달 29일 김 신부를 산업디자인학과의 정식 초빙석학교수로 임명하기도 했다. 지난 4개월간 그림을 그려온 작업실은 ‘초빙석학교수 연구실’도 겸하게 되는 셈이다. 그의 우선 임무는 스테인드글라스 완성이지만, 오는 2학기부터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할 예정이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KAIST가 세계 정상으로 나아가려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걸 해야 하는데 그림과 음악 등 예술에서 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더구나 김인중 신부님처럼 이미 세계 정상에 오르신 분이 캠퍼스에 계시면 학내 구성원들도 창의성뿐 아니라 자신감 등 배울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김 신부의 역할은 예술에만 그치지 않을 듯하다. 그는 “얼마 전 우울증에 시달리던 교수 한 분이 작업실로 찾아와 상담을 해주기도 했다”며 “그림이나 특강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다면 학생이든 교수든 누구라도 찾아오면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 중남부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중 일부. [사진 김인중]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 중남부 브리우드의 생 줄리앙 성당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중 일부. [사진 김인중]

소프라노 조수미, K엔터테인먼트 주도 이수만도 

KAIST가 이공계 교육에 예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에는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씨를 문화기술대학원 초빙석학교수로 임용했다. 조씨는 유럽에 상주하고 있지만, 1년에 수차례 방한 기회에 KAIST를 찾아 공연도 하고, 특강도 하는 방식으로 교수 역할을 수락했다. 조씨는 석학교수 취임 당시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산실인 KAIST의 초빙석학교수로 학생들을 만나 문화와 기술의 융합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과학기술을 접목한 예술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연구과정에 최선을 다해 동참하겠다”고 말한바 있다.

지난 2월에는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가 전산학부 석학초빙교수가 됐다. 당시 KAIST는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한류 문화를 선도해온 창작자를 교수로 초빙해 공학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미래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하고 창의적인 협업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KAIST는 이외에도 내년 9월 개관을 목표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세계적인 뉴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예술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진준 작가가 지난해 10월 전임교수로 임용돼 미술관 건립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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