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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서 뜰채로 건져 30분 내에 삶는 귀한 멸치, 맛도 으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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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새벽 4~5시 자란만 인근 해상에 설치된 정치망 그물.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신인섭 기자

새벽 4~5시 자란만 인근 해상에 설치된 정치망 그물.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신인섭 기자

같은 날, 크기가 같은 멸치라도 값은 3배 넘게 차이가 났다. 1.5㎏ 한 상자에 1만5000원부터 5만원까지. 7~8월은 남해 멸치잡이의 계절이다. 어떤 멸치가 맛있을까. 수협 위판장 당일 시세를 좌우한다는 멸치를 보려고 경남 고성 자란만 정치망 어장을 두 차례 찾아갔다.

5월 28일과 7월 11일 오전 4~5시 사이 배를 타고 정치망이 설치된 바다로 나갔다. 고기를 건져오는 작업부터 위판장 경매에 넘기고 활어 시장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기까지 오전 과정을 어장주와 함께했다. 배에서 작업하는 인원은 어장주와 4명의 외국인 선원이다. 정치망 멸치잡이는 부두에서 그물에 꽂힌 멸치를 털어내는 장면에 익숙한 도시인들 상식과는 딴판이었다.

7~8월이 남해 멸치잡이 성수기

정치망 한 통(선장)을 걷어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싣고 들어오는 배. 신인섭 기자

정치망 한 통(선장)을 걷어 그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싣고 들어오는 배. 신인섭 기자

멸치는 한국인이 밥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는 수산물일 것이다. 볶음·조림·젓갈로 먹고, 국물음식에 감초격이며, 김치에도 참견한다. 국내산 어류 가운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것도 멸치다. 통계청 어업생산동향 조사 결과를 보면 최근 3년(2019~2021)간 연근해어업 어종별 생산량 비중은 멸치(18.8/ 23.2/15.2%)와 고등어(13.3/8.9/16%)가 1위를 다툰다.

멸치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조업 방식 ▶멸치 크기 ▶삶을 때 신선도, 삶기, 말리기, 선별 등 가공 상태를 꼽을 수 있다. 조업 방식은 삶을 때까지 멸치 품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최학현 대표(붉은 옷)가 새벽 4시 30분 직접 배를 몰고 나가 외국인 선원들과 그물을 걷는다. 신인섭 기자

최학현 대표(붉은 옷)가 새벽 4시 30분 직접 배를 몰고 나가 외국인 선원들과 그물을 걷는다. 신인섭 기자

정치망의 일종인 죽방렴 멸치를 최고급으로 꼽고 값도 매우 비싼 이유는 바닷물에 놀고 있는 멸치를 뜰채로 떠서 단시간 내 삶아 말리기 때문이다. 원물에 상처나 스트레스가 적고,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가공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멸치 전체 생산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대형 권현망 선단은 두 척의 끌배가 입구에 날개를 단 자루그물을 양쪽에서 끌고 어군을 쫓아가며 포획한다. 그물을 30분~1시간 끌고 다니며 작업 후 끌어올려 가공하기 때문에 원물 상태가 죽방멸치와 차이가 크다. 삼천포 수협 위판장의 1.5㎏ 한 상자 경락가는 권현망 멸치 1만5000~3만원, 정치망 멸치는 2만5000~5만원이었다.

정치망(定置網)은 한곳에 쳐 놓고 고기 떼가 지나가다 걸리도록 설치한 그물을 말한다. 죽방렴의 대발(竹簾)을 그물로 바꿔 현대화한 어구다. 어군을 쫓아가서 잡는 것이 아니라 회유하다 그물로 들어온 고기를 건지는, 바다가 주는 만큼만 거두는 자연 친화적 어법이다. 수심이 얕은(50m 이내) 앞바다에서만 할 수 있다.

대개 길그물(대장)-통그물(헛통)-함정그물(소문장)을 한 통으로 구성하는데, 통을 2~3개 연결해 설치한다. 헛통 양쪽에 소문장을 설치하면 양통백이, 한쪽만 설치하면 외통백이라 한다. 어장주가 말하는 대장은 고기가 한 방향으로 가도록 헛통과 직각으로 길게 친 직선 그물이다. 대장을 따라 둥그런 헛통으로 들어온 물고기가 그 안을 빙빙 돌다가 깔때기처럼 작은 문을 설치한 소문장으로 들어가면 함정에 빠지는 거다. 어장 주인은 하루 두세 차례 때맞춰 소문장 그물을 차곡차곡 걷어 넘기며 물고기를 한쪽으로 몰아 가둔 뒤 뜰채로 떠올린다.

두 차례 찾아간 정치망은 ‘공룡공원’ 상족암 해안(천연기념물 제411호)에서 남서쪽 직선거리 1.2㎞ 바다에 있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봉홧골 앞바다다. 부두에서 175m 거리의 길그물부터 정치망이 시작된다. 300m 길그물에 직각으로 설치한 헛통과 소문장으로 구성된 안통(선장)이 있고, 이어진 길그물 250m 다음에 바깥통(후장) 그물이 있다. 두 통을 합쳐 한 망을 형성한다. 한 통의 가로 길이는 150m, 폭은 12~25m다. 어장 면허면적은 약 15㏊, 보호구역을 합하면 100~150㏊라고 한다. 그 해역에서 혼자만 정치망을 할 수 있는 어업권이 있는 것이다.

네이버 위성지도에 보이는 경남 고성 자란만 앞바다의 모원수산 정치망. 신인섭 기자

네이버 위성지도에 보이는 경남 고성 자란만 앞바다의 모원수산 정치망. 신인섭 기자

오전 4시 30분에 물 보러 나가는 배를 탔다. 정치망에 들어온 물고기를 걷으러 가는 걸 어민들은 ‘물 보러 간다’고 말했다. 배는 다른 어선보다 깊이가 상당히 얕아 턱이 낮은 ‘납작이배’다. 10분이 채 안 돼 소문장 위에 자리를 잡은 배는 그물을 걷기 시작했다. 걷어서 배 위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당겨 올렸다가 배 밑으로 흘려보내면서 그물을 좁혀 고기를 한쪽으로 몰고 간다. 깊이 12m의 그물은 두 겹이다. 눈이 성근 그물이 안쪽에 있고, 바깥 그물은 촘촘하다. 안통의 양쪽 소문장 그물을 모두 걷어 고기를 뜰채로 퍼 담는 데 26분이 걸렸다.

두 차례 작업 중 안쪽 그물에 든 큰 물고기는 병어, 삼치, 전갱이, 고등어, 꼬치고기, 물방어, 날치, 갈치새끼, 꼴뚜기 등이었다. 이번 주에는 전어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지난 11일에는 병어 200여 마리를 활어로, 삼치 40여 마리는 선어로 위판장에 보냈다. 찾는 이가 많은 꼴뚜기 말고 나머지는 위판장을 통해 사료 공장으로 간다. 바깥 그물에는 멸치와 다른 잔챙이 고기가 모였다.

그물에 든 물고기를 뜰채로 퍼 올리고 있다. 신인섭 기자

그물에 든 물고기를 뜰채로 퍼 올리고 있다. 신인섭 기자

정치망에서 퍼 담은 멸치는 13분 후 삶기 시작했다. 비늘이 반짝이는 생멸치를 고루 펴 담은 채반을 10개씩 쇠줄로 묶어 간이 크레인으로 운반해 끓는 소금물에 담근다. 5명이 23분 동안 숨 가쁘게 움직여 삶은 멸치는 220채반. 강한 화력으로 삶는 동안 줄어드는 물을 계속 보충한다. 염도가 떨어지지 않게 소금도 조금씩 추가한다. 포대를 보니 2016년산 천일염이다.

채반을 끓는 물에 담가 익히는 과정은 어장주와 최고참 선원이 전담한다. 멸치 크기에 맞춰 삶는 시간과 염도 조절이 가공 품질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염도를 물어보니 수치로 말할 수는 없고, 약 40년 가업의 감으로 맞춘다고 했다. 기준은 바닷물 염도다. 건조는 중멸치(길이 46~76㎜ 주바·고주바)의 경우 건조기에서 8시간 말린다.

어장 연매출 5억~10억, 멸치가 60%

멸치는 거둔 지 30분이 채 안 돼 바로 삶는다. [사진 이택희]

멸치는 거둔 지 30분이 채 안 돼 바로 삶는다. [사진 이택희]

이런 작업을 날마다 진행하는 어장은 고성 정치망 제58호, 어장주는 모원수산(옛 덕명수산) 최학현(54) 대표다. 1986년 첫 허가를 받은 어장을 2010년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정치망 위치는 처음 설치한 자리 그대로다. 이곳 물고기는 품질이 좋아 경매가가 평균보다 20% 이상 높게 나온다고 한다. 멸치는 삼천포 수협 건어물 경매 순번이 늘 1번이다. 첫 경매 물건 값이 높게 나오면 그 기조가 뒤로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어서 수협에서 어민들을 배려해 그렇게 정한 것이다. 어장 한 해 매출 5억~10억원의 60%는 멸치에서 나온다.

한번은 인천에서 전화 주문이 들어왔다. 이곳 멸치는 주변 지역에서 다 팔려 수도권까지 가는 게 드문데 선물이 들어와 먹어봤다고 한다. 맛있어서 주문하려고 상자를 보니 ‘고성군 자란만 최학현’이라는 생산자 표시만 있었다. 그걸 실마리로 삼천포 수협으로, 고성군청으로 전화해서 연락처를 알아냈다고 했다. 박스에 연락처 표시를 왜 하지 않는지 물었다. 최 대표는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지금도 주문하려면 전화밖에 방법이 없다. 전화도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다. 주문 문자메시지를 남기면 회신은 한다.

최 대표 증조부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조선유학생회의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최팔용(1891~1922) 선생이다. 일경의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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