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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폭력에 목숨 잃었는데, 군비 확장의 길 가려는 일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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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8호 20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일본 도쿄에 위치한 조조지 절에서 사람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추모하며 꽃을 헌화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일본 도쿄에 위치한 조조지 절에서 사람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를 추모하며 꽃을 헌화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날 나는 고치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고 있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나라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총격을 받고 사망한 날이다. 나는 2010년 아베 전 총리의 선거 유세를 취재한 적이 있다. 그때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 총리 입장으로 나라에 왔었다. 아베 전 총리는 2006년 총리로 취임한 지 1년 만에 건강을 이유로 퇴임하고, 2012년 다시 총리에 취임했는데 그 사이의 일이다. 2009년 민주당이 정권 교체를 이루면서  자민당은 야당이 됐다. 시민들 앞에 선 아베 전 총리는 민주당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나는 아베 전 총리가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는 정치를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현장에서 연설을 들으니 힘찬 목소리에 카리스마까지 느껴져 놀랐었다.

1930년대 일본 총리 피격 잇따라

아베 신조 전 총리는 8일 오전 나라시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사진 나리카와 아야]

아베 신조 전 총리는 8일 오전 나라시에서 참의원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사진 나리카와 아야]

피격 사건 다음날 아침, 카페에 가서 신문을 봐도 여전히 실감이 안 났다. 꿈속에 있는 듯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치 시내에 있는 고다이산으로 산책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 있는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의 동상과 마주쳤다. 고치 출신의 하마구치는 1930년 총리였던 당시 도쿄역에서 총격을 받고 다음해 사망했다. 하마구치는 군비확대에서 군비축소로 전환하려고 한 총리다. 1930년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다. 하마구치가 우익 청년의 총에 맞은 건 군축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평화 지향적인 총리가 우익 청년한테 총격을 받은 것이다. 1930년대 일본에서는 이런 사건이 잇따랐다.

아베 전 총리 피격 속보를 보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니, 전전(戦前)도 아니고…”였다. 지난 6월 tvN 역사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 출연했는데 그 날의 주제가 태평양 전쟁이었다. 1932년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암살당한 5.15 사건을 다루기도 했는데, 이 사건 역시 런던 해군 군축조약 체결에 대해 불만을 가진 군인들이 일으킨 것이다. 일본에선 교과서에도 나오는 누구나 아는 사건으로, 당시 여론은 이누카이에 대한 애도 분위기보다 오히려 군인들의 감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군부가 힘을 갖게 되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1930년 일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던 하마구치 오사치 전 총리의 동상. [사진 나리카와 아야]

1930년 일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던 하마구치 오사치 전 총리의 동상. [사진 나리카와 아야]

하마구치·이누카이 전 총리들과 아베 전 총리가 다른 점이 있다. 두 사람은 군비축소를 추진한 총리였지만, 아베는 군비확장을 추진한 총리였다. 특히 헌법 개정은 아베의 비장한 소원이었다. 아베 전 총리가 사망하고 이틀 후 치러진 참의원 선거 결과, 헌법 개정에 찬성하는 세력의 총 의석수가 중의원·참의원에서 개헌 발의 요건인 ‘총 의원의 3분의 2이상’을 확보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뜻을 이어, 특히 열정을 쏟았던 납치 문제와 헌법 개정 등 스스로 이루지 못한 어려운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아베 전 총리는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참의원 선거를 거쳐 헌법 개정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본은 더더욱 군비 확장의 길로 나아갈 듯 보인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이는 전전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폭력적인 세계정세도 일본의 군비 확장을 부추기고 있다.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본 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를 기념하는 식당의 카레 메뉴. [사진 나리카와 아야]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본 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를 기념하는 식당의 카레 메뉴. [사진 나리카와 아야]

사실 고다이산에 간 건 ‘마키노 식물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마키노 식물원은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식물학자 마키노 도미타로(牧野富太郎. 1862~1957)를 기념하기 위해 1958년 만들어진 식물원이다. 마키노는 고치 출신이며 94세로 죽기 직전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방대한 수의 식물 표본을 만들었다. 그가 이름을 지은 식물만 1500종이다. 최근 마키노가 각광을 받는 건 내년 방송하는 NHK 아침 드라마 ‘연속TV소설’의 주인공 모델이기 때문이다. 가미키 류노스케가 주연을 맡았다. 연속TV소설은 평일 아침마다 15분씩 6개월 동안 방송하는 드라마로 시청률이 높은 편이다. NHK 홈페이지에 따르면 “격동의 시대에서 오로지 사랑하는 식물과 마주보고 살았던 어느 식물학자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라고 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유신, 청일 전쟁, 러일 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모두 포함된 시대다. 그런 시대에 좋아하는 식물만 바라보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마키노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도 이 김에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본 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를 기념하는 식당의 티셔츠. [사진 나리카와 아야]

‘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본 학자 마키노 도미타로를 기념하는 식당의 티셔츠. [사진 나리카와 아야]

고다이산 산책 후 들어간 식당 메뉴에 ‘닥터 마키노(DR.MAKINO) 카레’가 있었다. 주인이 입은 셔츠에도 마키노가 그려져 있었다. 드라마를 통한 마키노의 인기를 노리는 듯하다. 마키노와 카레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맛은 있었다. 셔츠에 그려진 마키노의 얼굴을 보고 실제 인물과 닮았는지 확인하려고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그림과 똑같이 활짝 웃는 얼굴 사진이 나왔다. 전쟁 시기에 오로지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 100쇄 기념판. [사진 민음사]

민음사에서 출판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 100쇄 기념판. [사진 민음사]

소설 『인간 실격』을 쓴 다자이 오사무는 1948년 38세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도 내연녀와 함께 동반자살 했기 때문에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인간 실격』은 다자이의 자전적 소설이며 1948년 출간됐다. 최근 한국에서 『인간 실격』이 100쇄를 돌파했다는 뉴스를 보고 다시 읽어봤다. 주인공 오바 요조가 쓴 수기를 화자인 ‘나’가 읽는 구조의 소설인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수기의 시작이 상징하는 것처럼 요조는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고 생각한다. 요조가 자살 시도를 되풀이 한 것도 약물 중독자가 된 것도 모두 다자이 본인의 이야기다.

소설 『인간 실격』 젊은층도 많이 읽어

도쿄 미타카에 있는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살롱. [사진 나리카와 아야]

도쿄 미타카에 있는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살롱. [사진 나리카와 아야]

『인간 실격』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비교적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는 듯하다. 『인간 실격』을 읽었다는 30대 한국 친구들은 “위로 받았다”고 했다. ‘퇴폐미’라는 표현을 쓴 친구도 여러 명 있었다. ‘세계문학전집’의 하나로 『인간 실격』을 출판하는 민음사 측은 “특별히 마케팅에 힘을 쓴 것도 아닌데 작년부터 많이 팔리고 있다. 이유는 미스터리”라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경쟁사회에 지친 젊은이들이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인간 실격』에 공감하고 위로 받는 것 아닌가 싶다.

나 역시 10대에 읽었을 때는 나약하고 수동적인 요조에 별로 매력을 못 느꼈지만,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다자이가 살았던 시기를 생각하니, 다자이의 나약함은 전쟁을 위해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한 국가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 미타카에 있는 ‘다자이 오사무 문학 살롱’에도 가봤다. 다자이는 미타카에 살았다. 그곳에 가면 다자이가 쓴 책보다 다자이에 대해 쓴 책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자이는 일반 독자들한테도 인기가 많지만 작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다. 예를 들어 저명한 중국 문학자 다케우치 요시미는 “다자이 오사무의 무엇에 끌렸냐고 하면 한마디로 말해 일종의 예술적 저항의 자세였다”고 했다. 다자이는 전쟁에 편승하는 많은 작가들과 달랐다는 것이다.

전쟁 시기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 마키노도, 퇴폐적인 글을 쓰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다자이도 내 눈에는 평화주의자로 보인다. 일본이 전전을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도 되지만, 마키노나 다자이가 조명 받는 건 ‘싸우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꽤 많다는 뜻 아닌가, 희망을 느끼기도 한다.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전 아사히신문 기자.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동국대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2020년 한국에서 에세이집 『어디에 있든 나는 나답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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