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지영의 문화난장

세실극장의 세 번째 부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폐관과 부활이 키워드가 돼버린 극장이 있다. 무슨 공연을 하는지보다 극장의 존폐가 더 관심을 끈다. 덕수궁 옆 세실극장 얘기다.

지난 14일 세실극장에선 연극 ‘카사노바’가 막을 올렸다. 세실극장은 지난해 12월 당시 운영자였던 서울연극협회가 장비를 철수한 뒤 사실상 폐관 상태였다. 46년 역사가 이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올 3월 국립정동극장이 건물주인 대한성공회와 5년 임대 계약을 맺고 운영에 나서면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세실극장으로선 세 번째 ‘부활’이다.

김중업 설계 1976년 개관
IMF 등 폐관 위기 세 차례
정동극장, 새로 운영 맡아
“신예 연극인 키워내겠다”

‘국립정동극장 세실’의 개관작 ‘카사노바’의 리허설 장면. 무대를 따로 두지 않고 객석 사이사이 공간을 이용해 공연한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국립정동극장 세실’의 개관작 ‘카사노바’의 리허설 장면. 무대를 따로 두지 않고 객석 사이사이 공간을 이용해 공연한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대한성공회 4대 교구장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의 이름을 딴 세실극장은 1976년 4월 19일 문을 열었다. 대한성공회가 교회 재정 보충을 위해 임대용으로 지은 별관 건물에 들어섰다. 설계는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했다.

세실극장은 1970∼80년대 우리나라 연극의 중심지였다. 개관 첫 해인 1976년 연극 ‘홍당무’ ‘미란돌리나의 연인들’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 ‘고도를 기다리며’ 등 30여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각각 손숙·김용림, 고두심·추송웅, 강부자·한인수, 이호재·전무송 등이 주연을 맡았으니, 객석 312석 소극장에서 매일 밤 별들의 향연이 펼쳐진 것이다.

세실극장의 첫 번째 운영자는 동아방송 제작부장을 지낸 임석규다. 공연마다 관객이 꽉꽉 찼지만 객석 규모가 작아 수익을 내기 어려웠다. 1년이 채 못돼 재정난에 부닥쳤고, 마침 연극인회관 자리를 물색하고 있던 문예진흥원이 세실극장의 두 번째 운영자가 됐다. 1977년 2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만 4년간 연극인회관으로 사용되며 우리나라 소극장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후 1981∼97년엔 공연 제작그룹 마당이 운영하며 한국 창작극의 산실 역할을 했다. 마당놀이의 시초가 된 ‘허생전’, 창작 뮤지컬 ‘님의 침묵’ 등이 이 시절 세실의 히트작이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에서 버티지 못했다. 새 운영자를 찾지 못한 극장은 1998년 한 해 동안 문을 닫았고, 대한성공회는 사무실로 개조할 계획까지 세웠다.

첫 번째 폐관 위기에서 구원투수로 나선 사람은 극단 로뎀의 하상길 대표다. 1999년 1월 대한성공회와 임대계약을 맺은 뒤 그해 4월 제일화재와 제휴를 했다. 제일화재로부터 연 1억2000만원의 임대료 지원을 받기로 하면서, 극장 이름을 ‘제일화재 세실극장’으로 바꿨다. 국내 첫 ‘네이밍 스폰서’ 사례로 꼽힌다. 2012년 스폰서 계약이 종료된 뒤 극장 운영자는 극단 로뎀의 기획자 출신인 김민섭 씨어터오 대표로 바뀐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유행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적자가 쌓여갔고 결국 2018년 1월 폐관을 결정하고 말았다.

서울 덕수궁 옆 세실극장이 14일 새 이름 ‘국립정동극장 세실’로 재개관했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서울 덕수궁 옆 세실극장이 14일 새 이름 ‘국립정동극장 세실’로 재개관했다. [사진 국립정동극장]

두 번째 부활을 끌어낸 주체는 서울시였다. 2013년 세실극장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던 서울시가 장기임대 계약을 맺고 서울연극협회에 위탁운영을 맡겼다. 하지만 전기합선 등 시설 노후에 따른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폐관 수순에 들어갔다. 2019년 12월 마지막 공연 이후 2년 넘게 무대는 비어 있었다.

세실극장이 연거푸 존립의 기로에 서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 연극의 중심축이 대학로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연극계 주류 극단이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활용했던 1970∼80년대 전성기 시절과는 다른 존재 의미가 필요해졌다.

세실극장의 다섯 번째 운영자였던 김민섭 현 영덕문화관광재단 예술진흥팀장은 “덕수궁·정동 관광코스와 연계한 관광공연, 특히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공연으로 특화하는 게 맞다”고 했고, 여섯 번째 운영자였던 서울연극협회의 지춘성 당시 회장은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유산이 있는 곳인 만큼 아동·청소년 전용극장으로 운영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실제 이들이 운영하는 동안 극장의 정체성은 수시로 바뀌었다. 하지만 관광공연이나 아동극 모두 세실극장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진 못했다.

이제 일곱 번째 운영자가 된 국립정동극장 김희철 대표는 “인큐베이팅 기능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원사업 등으로 발굴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신예 창작진들이 한국 연극의 주축으로 발돋움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첫 작품인 ‘카사노바’는 지난해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은 임지민 연출의 신작이다. 다시 살아난 세실극장이 이번에는 동시대에 유효한 정체성과 브랜드 가치를 찾아 롱런할 수 있을까. 주어진 시간은 5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