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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유와 식칼 샀다"…대구 방화범 5개월전 남긴 소름 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인근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불이나 시민들이 옥상 부근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이 화재로 7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지난달 9일 대구 수성구 범어동 대구지방법원 인근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불이나 시민들이 옥상 부근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이 화재로 7명이 숨졌다. 연합뉴스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변호사 사무실 화재 참사 방화 용의자 천모(53·사망)씨는 지난 1월 자신의 노트북에 범행을 암시하는 듯한 글을 썼던 것으로 드러났다. ‘변호사 사무실을 불바다로 만들고자 휘발유와 식칼을 오래전에 구매했다’는 내용이다.

대구경찰청은 13일 대구 변호사 사무실 화재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담수사팀을 꾸려 사건을 수사해 온 경찰은 한 달간 수사 끝에 이번 사건을 천씨에 의한 방화살인으로 결론지었다. 범행동기는 천씨가 민사소송에 계속 패소하게 되면서 상대측 변호인 A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 탓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경찰에 따르면 천씨는 지난달 9일 오전 10시54분쯤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한 법무빌딩 2층에서 복도에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곧장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203호로 들어가 다시 불을 붙인 것으로 조사됐다. 현장에서는 천씨가 휘발유를 담았던 유리용기 3개와 미리 준비해 간 흉기도 발견됐다. 피해자 시신 6구 중 2구에서 흉기에 찔린 흔적이 있었다.

이 흉기가 피해자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경찰은 천씨가 피해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사 관계자는 “사망자 사무실 내 위치를 봤을 때 대피를 못 하도록 위협하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천씨가 휘발유와 흉기를 산 정확한 시점과 구입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달 10일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대구 수성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 현장에서 정밀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0일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대구 수성구 변호사 사무실 방화 사건 현장에서 정밀 감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은 천씨 노트북과 휴대전화 등에 대한 포렌식 수사 등으로 천씨가 A씨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수사 관계자는 “천씨가 자신이 투자한 시행사와 모두 5건의 소송을 진행했는데 관련 재판 과정을 기록한 것에서 A씨에 대한 원망을 많이 써놨다”고 설명했다. 또 천씨가 지난해 6~7월 두 차례에 걸쳐 A씨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협박성 전화를 한 적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함께 경찰은 건물주와 관리책임자, 소방점검자 등 5명을 소방시설법 및 건축법 위반, 업무상과실치상 등 혐의로 입건했다. 평소 비상구로 통하는 통로와 유도등을 임시 벽으로 가로막은 탓에 피해자들이 대피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판단이 나온다.

경찰은 방화 용의자 천씨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한편 건물 관리책임자 등에 대해서는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다.

지난달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건물 앞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화(弔花)가 놓여 있다. 뉴스1

지난달 10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변호사 사무실 건물 앞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화(弔花)가 놓여 있다. 뉴스1

이번 사건은 119에 화재 신고가 접수되면서 처음 알려졌다. 사건 당일 오전 10시55분쯤 최초 신고가 접수되고 6분 뒤인 오전 11시1분 화재 현장에 소방차가 도착했다. 신고 22분 만인 11시17분쯤 불이 꺼졌다. 불을 끄고 건물 안을 수색한 소방당국은 이 건물 2층 203호에서 모두 7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A씨는 이날 출장으로 화를 면했고, 함께 근무하던 김모(57) 변호사와 직원들이 숨졌다.

천씨와 A씨 사이의 ‘악연’이 시작된 것은 6년여 전인 201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씨가 대구 수성구에서 이뤄지는 재개발 사업에 수억원을 투자했다가 돌려받지 못하자 시행사 대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시행사 쪽 변호인이 A 변호사였다.

천씨는 재개발 사업 시행사와 2013년 11월 투자약정을 체결하고 2014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10차례에 걸쳐 3억6500만원을 지급했다. 이보다 앞서 투자했던 3억2000만원까지 합치면 총투자금은 6억8500만원이다.

지난달 13일 오후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대구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 희생자 합동추모식에서 대구지방변호사회 동료 변호사와 법률사무원 등 참석자들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3일 오후 대구 중구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대구 법률사무소 방화 참사 희생자 합동추모식에서 대구지방변호사회 동료 변호사와 법률사무원 등 참석자들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뉴스1

이후 천씨는 투자 지연손해금 청구와 함께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2019년 지연손해금 지급만 인용 판결했다. 이에 천씨는 시행사 대표의 책임을 지적하며 8억2000여만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소송을 추가로 냈다가 지난해 패소했다.

여기에 화재사건 하루 전날인 지난 8일에는 천씨가 시행사 대표에 대한 별도의 명예훼손 재판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범행 1시간 전 재판에서도 졌다. 이런 여러 재판 결과가 ‘도화선’이 돼 화재 참사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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