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 여자는 화난다" 문장만 1554번…어느 작가의 입양 고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는 덴마크 입양 한인, 여성, 성소수자로 살며 소수자의 시각으로 본 세상에 대한 화를 글로 풀어냈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2014년 덴마크에서 출간된 뒤 덴마크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후 해외 입양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데 한 발판이 됐다. 출판사 난다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는 덴마크 입양 한인, 여성, 성소수자로 살며 소수자의 시각으로 본 세상에 대한 화를 글로 풀어냈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2014년 덴마크에서 출간된 뒤 덴마크 내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후 해외 입양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는 데 한 발판이 됐다. 출판사 난다

"'화'는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 데서 나오고,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잖아요. '화'는 매우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한국계 덴마크 시인이자 번역가 마야 리 랑그바드(42)는 최근 출간된 자신의 시집『그 여자는 화가 난다』(난다) 에서 내내 화를 낸다.

그는 해외 입양인, 여성, 성 소수자의 시각에서 무려 1554번이나  '그 여자는 ~ 화가 난다'는 문장을 반복하며 국제입양과 불평등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분노'로 책을 완성했다. 작가는 최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모든 혁명도 '화'에서 시작되지 않나. 화를 피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책을 쓰면서 화를 해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입양에 대해 알면 알수록 화가 더 나서, 책을 쓰는데 7년이나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 여자는 ~ 화가 난다'를 반복하며 시와 산문의 형식을 모두 가진 글에 대해 작가는 "내 정체성이 하이브리드이듯, 글의 형식도 하이브리드"라고 했다.

덴마크 입양 한인… "'또 태어난 여자애'여서 입양됐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 표지. 겉 표지를 벗겨내면 흰 표지에 랑그바드 작가의 필체로 쓴 덴마크어 'Hun er vred(She is angry)' 제목이 드러난다. 직역하면 '그녀는 화난다' 정도로 번역되는 문장을 '그 여자는 화가 난다'로 정한 건 덴마크에서 낭독회를 열며 랑그바드 작가와 인연을 맺었던 김혜순 시인의 조언이다. 김정연 기자

'그 여자는 화가 난다' 표지. 겉 표지를 벗겨내면 흰 표지에 랑그바드 작가의 필체로 쓴 덴마크어 'Hun er vred(She is angry)' 제목이 드러난다. 직역하면 '그녀는 화난다' 정도로 번역되는 문장을 '그 여자는 화가 난다'로 정한 건 덴마크에서 낭독회를 열며 랑그바드 작가와 인연을 맺었던 김혜순 시인의 조언이다. 김정연 기자

1980년생인 작가는 어린 시절 덴마크로 입양된 뒤, 덴마크에서 2006년 작가로 데뷔했다. 이후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에 살면서 한국과 입양에 대해 여러 조사를 했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 이름은 이춘복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입양 얘기만 할 정도로 절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통해 '선진국으로의 해외 입양'을 하나의 '산업'이라고 분석하며 비판한다. "입양인으로 살면서 '입양되지 않았다면'을 가정하며 늘 감사하는 걸 요구 받았다"며 "서양에서 해외 입양에 대해 '윈윈'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그 시스템이 모두에게 이익만 남기는 건 아니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데 입양을 서구로 보내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내가 입양 간 이유도, 부모가 아들을 원했는데 나는 '또 태어난 여자애'였기 때문"이라는 작가는 "'그녀'라는 주어를 쓴 것도 입양의 성별 이슈를 강조하고 싶어서"라고 설명하며 "그래서 입양은 페미니즘 이슈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2014년 한국에선 출간 어려웠을 주제"

7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 간담회는 이훤 시인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사진 출판사 난다

7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열린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 간담회는 이훤 시인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사진 출판사 난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2014년 덴마크에서 출간됐고, 2019년 출판사 난다 김민정 대표의 눈에 띄어 국내 출간 작업을 시작했다. 2014년 출간 당시 덴마크 내에서 작가에게 증오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도발적'인 주제였지만, 이후 해외 입양에 대해 막연히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아닌, 비판적인 논의가 확산됐다고 작가는 전했다.

랑그바드 작가는 "2014년 한국에서는 이 책이 출간되지도 못할 정도로 도발적인 주제였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이후 '미투' 라는 꽤 큰 움직임이 있었고, 이제 한국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출간될 수 있게 길을 터준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민정 대표는 "번역 과정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덴마크어 번역이 꽤나 어려운 작업이었다"며 "손화수 번역가의 번역, 덴마크 현지 문화에 대한 교차 검증, 작가가 쓴 시적 언어 재확인 등 여러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 번역"이라고 설명했다.

"입양인 집단 증언과 같은 기록… 한국 독자 만나는 꿈 이뤄졌다"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는 "2014년 책을 펴냈을 때부터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게 꿈이었는데, 이뤄졌다"고 말했다. 출판사 난다

마야 리 랑그바드 작가는 "2014년 책을 펴냈을 때부터 한국 독자들을 만나는게 꿈이었는데, 이뤄졌다"고 말했다. 출판사 난다

랑그바드 작가는 "2014년 덴마크에서 책이 나왔을 때부터 한국에서 독자들을 만나는 게 꿈이었는데 이뤄졌다"며 "한국에서 작가로 알려지는 이 순간이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고, 하나의 시기을 끝 맺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입양인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던 책이고, 모든 입양인들의 집단적 증언과 같은 기록"이라며 "모든 입양인을 위해 쓴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어로도 출간되길 바랐다"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