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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日 기업과 직접 협상”…“배상·화해 말라” 日 태도 변화 가능할까

중앙일보

입력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단인 임재성·장완익 변호사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4일 민관협의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피해자와 일본 전범 기업 간 협상 창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뉴스1]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단인 임재성·장완익 변호사와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4일 민관협의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피해자와 일본 전범 기업 간 협상 창구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뉴스1]

“강제동원 문제는 오랜 시간 피해자와 가해 기업이 소송을 벌여 온 사안이다.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이 만나 논의를 하는 것이 순리다.”

2018년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을 승소로 이끈 법률 대리인과 피해자 지원단은 지난 4일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위한 민관 협의회 첫 회의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은 입장을 밝혔다.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대법 판결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제철(신일철주금)·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 기업과 직접 협상해 해결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현금화 앞두고 '협상' 요청…"배상은 진정한 화해 아냐" 

2018년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 직후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는 김성주 할머니. 김 할머니는 미쓰비시중공업이 대법원 판결에 따른 배상 책임을 이행하지 않자, 추가로 현금화 조치를 신청해 이르면 오는 8~9월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중앙포토]

2018년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대법원 판결 직후 손을 들며 환호하고 있는 김성주 할머니. 김 할머니는 미쓰비시중공업이 대법원 판결에 따른 배상 책임을 이행하지 않자, 추가로 현금화 조치를 신청해 이르면 오는 8~9월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앞두고 있다. [중앙포토]

2018년 11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양금덕·김성주 할머니의 경우 이르면 올 가을 배상을 위한 모든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다.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을 배상금으로 활용하기 위한 압류 신청에 이어 이를 매각해 현금화하는 대법원 결정을 앞두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피해자 측이 일본 기업과의 대화를 요청한 것은 십수년에 걸친 법적 다툼의 목적이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양금덕·김성주 할머니를 지원하고 있는 이국언 근로정신대시민모임 대표는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일본 기업 자산을 강제 매각해 배상을 받으면 통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고 존엄을 회복하는 ‘진정한 화해’가 될 수 없다”며 “단순히 배상금을 언제 받을지, 얼마나 받을지보다는 일본 기업이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해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피해자들이 이를 수용해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방식의 해결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日 "개별 협상 배상·화해 말라" 지침 

2020년 1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찾은 양금덕 할머니. [중앙포토]

2020년 1월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찾은 양금덕 할머니. [중앙포토]

사실 2018년 11월 대법원 판결의 피고였던 미쓰비시중공업의 경우 과거 사죄 표명을 포함한 해결책 마련에 의지를 보인 바 있다. 2010년 11월엔 피해자 측과 해결책 마련을 위한 첫 협의를 가졌고, 이후에도 2년간 총 16차례의 협의 테이블이 마련됐다. 특히 최종 협의 단계에선 사죄 문구를 어떤 표현으로 담을지에 대한 논의까지 오갔다고 한다. 또 대법원 판결 이후인 2020년 1월엔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찾아온 양금덕 할머니와 면담을 갖고 의견을 청취했다.

2018년 11월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배상 문제로 소송중인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배상과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2018년 11월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배상 문제로 소송중인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어 (배상과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문제는 일본 정부의 완강한 태도다. 일본 측은 대법원 판결 직후인 2018년 10월 말 외무성·경제산업성 등 일본 정부 부처가 연합해 공동으로 설명회를 열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으니 일체의 배상과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취지의 지침을 내렸다. 지침의 대상은 강제징용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에 의해 피고가 된 약 70여개 일본 기업이었다. 한국 내에선 배상 문제가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 기업 간 민사 소송의 형태로 전개됐지만, 일본은 이를 국가 대 국가의 문제로 인식해 직접 가이드라인을 내린 셈이다.

이같은 지침에 따라 일본 기업은 피해자와의 면담·협의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일본제철이 2018년 11·12월 및 2019년 2월 세 차례에 걸쳐 피해자 대리인단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에 피해자들은 법원에 일본제철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현금화해달라고 신청했고, 강제징용 문제의 갈등 구도가 점차 첨예해졌다.  

한·일 '외교적 노력' 전제돼야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 [연합뉴스]

결국 일본 정부의 이같은 지침이 유효한 상황에선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 기업 간 협상 창구가 마련된다 해도 구체적인 해결책이 도출되긴 어렵다. 민관협의회 등을 통한 국내 의견 수렴 절차와는 별개로 일본의 완강한 태도를 전환하기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고, 이후 피해자와 일본 기업 간 협상 창구가 마련된다면 해결책이 마련될 여지는 남아있다. 전범 기업의 사과와 각종 지원 방안 마련을 전제로 현금화 조치를 동결하는 큰 틀의 협의안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세부적인 조건을 주고받는 식의 ‘패키지 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외교 소식통은 “한·일 관계의 변화 기류와 한국 측의 해법 마련 노력 등 꽉 막혀있던 강제징용 갈등을 해소할 ‘변수’가 점차 생겨나고 있다”며 “매우 좁은 틈이지만 한·일 간 외교적 해법이 도출될 여지가 분명히 있는 만큼 정부 역시 진정성을 갖고 문제 해결에 임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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