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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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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최현주 금융팀 기자

돈이나 재물을 걸고 따먹기를 하는 행위를 노름이라고 한다. 대개 일시적이고 소규모면 내기,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면 도박으로 본다. 노름의 근간은 추첨이다. 뽑힌 사람이 돈이나 재물을 갖는 방식이다. 학계에선 노름과 인류의 역사를 비슷하게 본다.

원시인은 동물 뼈로 주사위를 만들어 사용했고 기원전 1600년 이집트에선 타우(Tau)·세나트(Senat)라는 추첨 놀이를 했다. 성경에도 제비뽑기가 자주 등장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땅을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활용했다는 식이다.

한국에서 노름이 성행한 시기는 조선시대(1392~1910)다. 중국을 드나들던 역관(통역을 맡은 관리)을 통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는 투전(손가락 크기의 두꺼운 종이에 끗수를 적은 도구)이 유행했다. 영조 때 전국 곳곳에서 투전이 벌어졌고 ‘투전이 도둑질보다 더 큰 해악’이라며 법으로 금지했다.

이후 현재까지 노름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근절하지 못했다. 대신 합법적으로 노름을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현재 정부가 공인한 노름(사행산업)은 카지노, 경마, 경륜·경정, 복권, 체육진흥투표권, 소싸움경기 등 7가지다. 이들 사행산업 수익금의 일정액은 각종 기금을 통해 공익사업 재원으로 쓰인다.

어느 시기나 노름은 골칫거리였는데 특히 노름빚이 문제였다. 빚까지 내 노름을 하다 결국 탕진하면 각종 범죄·자살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최근 가상화폐를 투자로 볼지, 노름으로 볼지 논란이다. 지난 1일 서울회생법원이 가상화폐 투자 손실금을 개인회생 변제금으로 고려하지 않겠다는 실무준칙을 제정하면서다. 예컨대 1억원을 빌려 코인에 투자해 9900만원을 잃었다면 이전엔 빌린 1억원을 보유자산으로 봤지만, 앞으로 남은 100만원만 자산이다.

법원은 자살 등 가상화폐 손실에 따른 사회적 문제를 줄이고 채무자의 빠른 경제 복구를 위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반면 정부가 노름빚을 갚아주며 ‘빚투’(빚을 내 투자)를 권장한다는 반발도 거세다.

2004년 도입한 개인회생제도는 성실하지만, 불운한 채무자를 구제하기 위한 장치다. ‘적어도 이런 사람은 회생시켜야지’라는 암묵적 합의가 전제다. 가상화폐 손실을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준 개인이나 금융기관, 나아가 정부가 함께 손해 보는 것이 마땅할지 분명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