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마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조석연의  『마약의 사회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문헌에서 마약류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건 광해군 2년(1610년) 완성됐다는 『동의보감』 탕액편에서다. 아편은 이질이 멎지 않을 때 팥알만큼 따뜻한 물에 풀어 복용하되,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많이 쓰지는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서 아편은 가정상비약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청나라에 흡연용 아편을 들여오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청나라는 아편 흡연 인구가 200만 명에 달하자 1839년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불태우고 퇴거를 명령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반발해 청나라에 함대를 파견하고,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다. 자연히 중독자도 늘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조선 정부는 아편을 극도로 경계했다. 개항기 일본과 체결한 ‘조일수호조규’ 등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항을 삽입했다. 1898년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은 아편을 더욱 강력히 규제하는 계기가 됐다. 뇌물수수에 연루돼 유배형을 받은 역관 김홍륙이 궁중 요리사를 사주해 고종과 순종이 마실 커피에 다량의 아편을 탄 사건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통치자금 마련을 위한 아편 생산기지로 전락했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 자금을 마련하려고 아편을 밀매매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밀수출용으로 제조하던 필로폰이 정부의 강력한 단속으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되레 국내에서 유통돼 사회 문제가 됐다. 마약 중독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다분히 국제 정세와 정치, 사회 환경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전 우리나라는 마약사범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하거나,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규정해 생계수단을 빼앗는 등 엄벌주의로 일관했다. 이는 한국이 상대적인 마약 청정국이 되는 데 기여했지만, 마약중독자의 치료와 사회복귀를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컸다.

 요즘엔 마약사범을 사회악으로 모는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이들이 겁 없이 마약에 손대는 모양이다. 지난해 마약사범 중 10대는 450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20대 마약사범이 전체의 31.4%(5077명)로 30대와 40대를 누르고 처음으로 1위를 기록했다. 최근엔 고교 3학년 학생이 텔레그램 마약방 총책으로 검거돼 충격을 준다. 달라진 사회환경이 젊은이들을 망칠까 두렵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