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랭귀지』 낸 김용호 사진가
“수십 년 동안 해온 작업물을 정리하며 궁금해졌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사진가’라고 답하지만, ‘어떤 사진을 찍는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 워낙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하다 보니 무엇이 나인지 나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나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성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그 ‘다양성’에 대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여배우들’서 남자 주연 맡기도
김용호 사진가가 최근 사진집 『포토 랭귀지(Photo Language)』(몽스북)를 출간한 이유다. 김용호 사진가는 40여 년간 상업 사진과 예술 사진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히트 작품을 탄생시킨 국내 대표 사진가다. 오랫동안 보그·바자·GQ 등의 패션 매거진과 작업하며 당대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 트렌드를 포착해온 기록자이고, 현대카드·현대자동차·삼성전자·KT·엘칸토·아모레퍼시픽 등 그의 손을 거친 수많은 기업 광고 사진들은 지금 봐도 “아, 저 사진!”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기억 속에 생생하다. TV·잡지에 광고 사진이 나오는 동안 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리고 사진이 판매되는 기록도, 광고 이미지에 사진작가의 크레딧이 표기된 것도 국내 최초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조금 뒤늦게 시작한 예술사진도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다. 물밑에서 바라본 연잎 ‘피안’, 사계절 ‘매화’, 인간의 등을 조명한 ‘몸’, 1920~30년대 선각자였던 ‘신여성’ 등을 주제로 한 연작들을 비롯해 백남준부터 이어령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의 초상을 담은 사진은 우리 시대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자산이다.
한 가지 일을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여러 가지 일을 다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김용호 사진가만큼 열일 하면서도 다 잘하는 이는 흔치 않다. 사진 평론가 신수진씨는 “김용호 사진가는 다양한 작업을 하는데 모두 적정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평한 바 있다.
“내 작업들이 혹여 어린 시절 ‘종합선물세트’로 여겨질까 걱정이 됐었죠. 상자 안에 뭔가 잔뜩 들어있긴 한데 진짜 좋은 건 한두 개뿐, 인기 없고 맛없는 과자도 함께 들어 있으니까요. 누구나 인정할 만큼 적정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 그게 진짜 실력이죠. 옛날 어른들 말씀에 ‘반푼수, 집안 망친다’는 말이 있어요. 반만 재주 있는 자가 이것저것 집적거리다보면 제대로 하는 것 하나도 없다. 그러니 한 우물만 파라는 말씀인데 나는 한 가지만 지루하게 하기보다 다양성을 즐기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껏 해왔던 일도 모두 다 내가 재미있어 했던 일들이죠.”
그의 호기심과 오지랖은 업계에서 유명하다. 1990년대 청담동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카페 드 플로라 사장에게서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면 진정한 청담 피플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배우 이정재를 비롯해 당대 가장 핫한 배우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이 프랑스 파리의 살롱처럼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우아한 카페 겸 와인바 ‘카페 드 플로라’의 사장이 바로 김용호 사진가였다. 윤여정·이미숙·고현정·김민희 등이 출연한 영화 ‘여배우들’에선 유일한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김용호 사진가의 스튜디오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 여배우들의 하루를 담은 다큐 형식의 영화였기에, 그는 당대 가장 잘 나가는 사진가로 실제 영화에 등장했다. 머리에 빛나는 전구를 달고 있는 아트 토이 ‘모던 보이’를 창조하고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었던 설치미술가로서의 이력도 있다.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시절을 보내온 사진가가 왜 갑자기 ‘책’을 내려 했을까.
“사진가는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죠. 내가 그동안 사진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해왔나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광고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내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스토리텔링’이에요. 언제부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이미지보다 먼저 이야기를 떠올렸죠.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 자체를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아름다움이 어디서 왔는지를 함께 들려주면 작품의 의미와 가치가 훨씬 높아지니까요.”
총 10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된 544쪽 분량의 책갈피를 넘기다 보면 완벽한 구도와 균형감, 극도로 치밀하게 연출된 사진의 향연에 일단 눈부터 호사를 누리게 된다. 패션 화보와 광고는 물론이고, 개인적인 여행사진까지 한 사람의 시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개성 있는 이미지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진짜배기’는 이 사진들 사이를 채우고 있는 텍스트다. 대기업 임원을 설득시켜야 하는 광고사진부터, 재능기부를 하며 함께한 거리 위 사람들의 모습까지. 그는 사진 한 장마다 차별화된 이미지를 위해 어떤 고민을 했고, 그 결과 어떤 아이디어를 얻었고,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기록해 놨다. 이미지와 관련된 다양한 창작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책이 있을까. 너무 직관적이면 촌스럽고, 너무 감각적이면 설명이 불충분해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운 시소게임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는 비법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낯설게 보기’ 위해 지금까지 읽었던 엄청난 독서량과 탐구력에는 혀를 내두르게 된다. 예를 들어, 카드 광고를 찍는다면 화페의 역사부터 시작해 기호·상징에 관한 책을 지나 64개의 괘로 이뤄진 역술책까지 읽는 게 그만의 방법이다. 제품의 기능보다 그 제품을 사용하게 될 소비자(인간)의 욕망과 본질을 탐구하고 이를 이미지로 구현한 표현력 또한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됐는지도 책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사진·광고 찍기 전에 관련 서적 탐독
“2030세대가 이 책을 읽고 ‘이렇게 다양한 사고로 스토리텔링 사진에 접근하는 사람이 있구나’ ‘창작을 할 때 이런 다양한 시각과 방법도 있구나’ 생각한다면 감사하죠. 사실 세상에 무용한 경험은 없어요.”
이미지 창작자가 아니어도 책갈피를 넘기며 그가 사진 속에 숨겨 놓은 이야기들을 읽어내는 일은 흥미롭다. 그의 사진은 현재 이미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이전과 이후 이야기까지 궁금하게 한다. 저 빈 의자에는 방금 누가 앉았다 갔을까,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일본 교토의 고즈넉한 골목을 걷고 있는 기모노 차림의 여성은 누구이고, 그녀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일까 동선을 상상하게 된다. 정지된 이미지를 넘어, 인간이든 사물이든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본질을 연구하고 표현하려 노력한 결과다. 그에게는 “미래의 AI가 등장하는 화보라도 그 배경이 클래식한 공간인 건 100년~200년 후에도 최상위층은 최고의 럭셔리 아날로그 문화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통찰력이 있다.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컬러의 옷을 입고, 찬란한 주얼리로 몸을 감쌌지만 어딘가 고독해 보이는 피사체들에선 현대인의 본질인 고독과 현대 소비생활의 냉소가 느껴진다.
이어령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테스트용 사진을 본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건 잘 찍은 사진이 아니야, 여기에는 내가 있잖아. 내가 보여.” 이보다 더 귀한 찬사가 또 있을까.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라 불렸던 선생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그의 사진을 통해 발견한 대목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소름이 돋는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유형으로 마크 주커버그와 스티브 잡스를 꼽는 이유, 작품 전시가 한창인 갤러리에 휠체어와 요가 매트를 갖다놓은 이유도 읽고 나면 역시나 무릎을 치게 된다. 정점에 오른 사진가가 새삼 자세를 바로 하고 “나는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해왔다” 독백하는 소리에 귀기울여 보는 일은 이렇게 즐겁고도 울림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