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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돌려 막고, 계급장 떼고…군 지휘부 “나 지금 떨고 있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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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용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 시대 고위 간부 잔혹사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2008년 말 평양을 방문했을 때다. 숙소 1층 연회장에서 평양 주재 무관단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북한군 중장(별 둘)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호텔 직원들은 물론 북한 주민들이 썰물처럼 양쪽 벽으로 붙으며 길을 터줬다. 북한에서 군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첫 해인 2012년 2월 23명을 시작으로, 지난 10년 동안 21차례에 걸쳐 645명의 장성을 진급시켰다. 2012년 4월엔 민간인이던 최용해에게 군복을 입혀 왕별(차수)을 달아주고, 총정치국장에 임명하는 등 2012년 한 해에만 네 차례의 진급 명령을 내렸다. 이후 북한은 2014년(3회)를 제외하고, 매년 1~2차례 ‘별’을 새로 또는 하나 더 달아주는 승진인사를 해 왔다. 특히 집권 초기 3년 동안 231명을 진급시키며 군심(軍心)잡기에 나섰다.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믿을 건 군대 뿐”이라며 선군(先軍) 정치를 폈던 관성도 작용했으리라.

김일성~김정일 63년간 국방상 8명
김정은 10년 동안 평균 임기 1년꼴

지난 10일 군 요직 3분의 2 교체
집권 직후 대대적 물갈이 여전

노동당과 내각도 인사 교체 잦아
간부 인사 통한 쥐어짜기로는 한계

국방상, 평균 재임은 1년 남짓

북한이 지난 4월 25일 진행한 열병식과 관련해 제작한 기록영화 속에 애플컴퓨터가 등장했다. 열병식 관계자들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중앙TV촬영]

북한이 지난 4월 25일 진행한 열병식과 관련해 제작한 기록영화 속에 애플컴퓨터가 등장했다. 열병식 관계자들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조선중앙TV촬영]

김 위원장이 군부를 휘어잡기 위해 별자리만 나눠준 건 아니다. 빈번한 군 지휘부 인사를 통해 자기 사람들을 심고 책임도 묻는 등 기강을 다잡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일 폐막한 노동당 전원회의(8기5차)에서 총참모장과 총정치국장·사회안전상·국가보위상을 교체했다. 총정치국장과 총참모장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국방상과 함께 3대 핵심 직책으로 꼽힌다. 이날 국방상(이영길)을 제외하곤 군부 요직을 모두 바꾼 셈이다. 이번 인사의 배경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 4월말 북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발병 직후 김 위원장이 질책을 한 사실을 북한 매체가 공개했다는 점에서 코로나19 발생에 따른 문책성 인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군 지휘부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번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 주목거리다. 김 위원장은 집권 직후인 2012년 4월과 7월 두 차례의 인사를 하며 총정치국장과 인민무력부장(현 국방상)· 총참모장 등 소위 군부 3인방을 모두 갈아치웠다.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인민보안부장(현 사회안전상)도 교체 대상이었다. 부장 공석 상태에서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를 맡았던 우동측 제1부부장도 교체됐다. 우동측은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 김 위원장과 함께 운구차에 손을 얹고 걸은 ‘운구차 7인방’ 중 한 명으로 김정은 시대의 실세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군 지휘부 전원교체 카드를 빗겨가지 못했다.

당시 군수뇌부를 전원교체한 건 김정은 체제 출범과 맞물린 세대교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 집권 10년이 지나도록 북한 군 수뇌부의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회성 인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군 수뇌부가 안정돼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12년 두 차례의 인민무력부장 인사를 단행했던 것에 비해 최근 교체 횟수가 줄어 들기는 했다. 그런데도 지난 10년 동안 북한의 국방상과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은 각각 9차례 바뀌었다. 군부 1인자로 평가받고 있는 총정치국장 역시 6명이 맡았다. 군부 출신이 맡는 인민보안상(현 사회안전상)과 국가정보원장 격인 국가안전보위부장(현 국가보위상)도 각각 6명과 4명을 바꿨다.

현철해 국방성 총고문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위에 애플컴퓨터가 놓여있다. [조선중앙TV 촬영]

현철해 국방성 총고문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위에 애플컴퓨터가 놓여있다. [조선중앙TV 촬영]

이런 모습은 어쩌면 통상 1~2년마다 바뀌는 한국 등 서방 국가에선 자연스런 모습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현직을 유지토록 하며 수 십년간 업무를 맡겼던 김일성·김정일 시대와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다. 김일성 주석은 집권 46년 동안 5명의 인민무력부장을 기용했다. 최용건·김광협·김창봉·최현·오진우 등이다. 17년 동안 북한을 통치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엔 인민무력부장을 맡은 인물은 3명(최광·김일철·김영춘) 뿐이다. 수뇌부가 바뀌면 연이은 인사가 단행된다는 점에서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익숙한 북한 군부엔 공포로 작용할 수 있다.

여기에 군 수뇌부를 공개 처형한 건 공포정치의 정점이다. 김 위원장은 총참모장을 거쳐 인민무력부장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던 현영철을 2015년 4월 처형했다. 김 위원장이 참석한 회의에서 졸거나 지시를 불이행했다는 불충이 이유다. 김 위원장 집권 초기 각각 총참모장과 총참모부 작전국장을 맡았던 이영호와 변인선 역시 처형 또는 숙청됐다.

회전문, 그리고 ‘부활’ 인사

북한은 지난 10일 인사에서 정보와 반탐 등 체제보위 업무를 책임졌던 정경택을 총정치국장에 앉혔다. 총참모부 제1부총참모장이던 박수일에겐 사회안전상을 맡겼다. 지난해 6월 김 위원장의 질책을 받고 모든 자리를 박정천에게 넘기고 물러났던 이병철을 1년만에 노동당 비서와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한 건 부활 인사의 전형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런 회전문 또는 부활인사는 당과 내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0일 인사에서 당의 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국원 30명중 6명이 새로운 얼굴이다. 이들 중 박태성·최선희·한광상은 이전에도 정치국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특히 2020년 1월 외무상을 맡은 이선권은 당 통일전선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북 군사회담 대표를 지낸 그는 김정은 시대 들어 조국평화통일위원장으로 남북 대화에 나서더니 외무상을 거쳐 이번에 다시 당의 대남 부서인 통일전선부로 이동했다.

북한 노동당의 재정을 담당(재정경리부장)하던 한광상은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이번에 경공업부장이 됐다. 지난해 1월 임명된 지 한 달만에 물러났던 박태성 당 비서 역시 이번에 다시 비서로, 박태성과 함께 자리를 내놨던 김두일 경제부장은 이번에 내각 정치국장에 기용됐다. 북한에는 고위 간부들이 업무상 ‘과오’를 범할 경우 지방이나 공장·기업소에서 노동을 하도록 하는 ‘혁명화’라는 처벌이 있다. 일종의 긴장조성이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와 셀프봉쇄, 자연재해, 전염병 창궐 등 북한은 스스로 대동란이라고 여길 정도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올해 상반기 20회 가까이 미사일을 발사하던 북한은 지난달부터 정치국 회의와 당 전원회의, 비서국회의를 연이어 열며 내부 단속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아니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대적인 인사는 내부 자원 고갈로 인한 어려움을 간부들의 쥐어짜기 식으로 막아보려는 시도는 아닐까. 유일체제이자 종교적 성향이 강한 북한 체제의 속성상 김 위원장의 위상은 여전히 공고하다. 하지만 그가 내세우는 애민(愛民)과 단번도약을 통한 경제 발전은 마른 수건 짜기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간부들을 쥐어짜기가 아닌 대화와 비핵화, 이를 통한 외부자원 투입의 여건을 조성하는 게 최선이다.

김정은의 ‘애플’ 사랑

북한 조선중앙TV는 6월 한 달 동안 74분 25초짜리 기록영화(다큐멘터리) 한 편을 네 차례 방영했다. 지난달 19일 사망한 현철해 국방성 총고문의 충성심을 집중 조명한 ‘빛나는 삶의 품-태양의 가장 가까이에서’다. 기록영화는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3대째 북한 최고지도자 곁에서 충성을 다하는 현철해의 일생을 다뤘지만 핵심은 임종을 지킨 김정은 위원장을 향한 칭송이다.

기록영화 중간, 47분 47초쯤 눈길을 끄는 장면이 등장한다. 생전 현철해가 사용하던 사무실을 촬영한 영상이다. 책상 위엔 김 위원장과의 직통전화로 추정되는 것 등 전화기 세 대가 설치돼 있고, 바로 옆엔 모니터·본체 일체형의 컴퓨터가 놓여 있다. 모니터 뒷면에 새겨진 사과 그림이 또렷하다. 모조품이 아니라면, 실제 사용한 컴퓨터라면 현철해가 애플 컴퓨터를 사용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앞서 북한이 지난달 28일 공개한 열병식 기록영화에도 애플 컴퓨터가 등장한다. 인민군 복장을 한 행사 관계자들이 사무실에서 회의하는 장면에서다. 정확한 기종이나 생산연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외형상 현철해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위원장은 미사일 발사 현장 등 공개 활동을 하며 애플의 아이패드를 이용하는 모습이 종종 공개되곤 했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 데스크탑이나 비행기 안을 촬영한 사진 속에 등장하는 컴퓨터 역시 애플이다.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김 위원장이 스위스 유학 시절 애플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집권 이후에도 자기에게 익숙한 애플 제품을 간부들에게 일괄 지급해 쓰도록 하고, 동시에 경제제재를 해봐야 들여갈 건 들여간다는 일종의 시위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