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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21만명 중 일부만 배상?…대위변제 '악마의 디테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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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19년 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가족협동조합 등 3개 단체 회원들이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발의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기금 마련 법률안', 일명 '문희상안' 통과를 촉구하는 연대 서명을 전달하는 모습. [연합뉴스]

2019년 일제강제동원희생자유가족협동조합 등 3개 단체 회원들이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발의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 배상 기금 마련 법률안', 일명 '문희상안' 통과를 촉구하는 연대 서명을 전달하는 모습. [연합뉴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거론되는 대위변제는 2019년 국회에서 ‘문희상안’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다 성과를 보지 못한 기금 조성안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골조는 비슷하다고 해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구체적 구성이나 구조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정부가 대위변제를 추진할 경우 고비가 될 수 있는 3대 핵심 쟁점을 짚어봤다.

[한‧일 ‘현금화 시한폭탄’ 어떻게 멈추나-下]

①대위변제 ‘대상’ 설정

강제징용 피해자는 ①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이 확정된 경우 ②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인 경우 ③소송에 나서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①에 해당하는 피해자는 총 14명으로, 2018년 10월(1건)과 11월(2건) 대법원 판결을 통해 각각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현재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중인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은 1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소송과 무관한 전체 강제징용 피해자의 경우 노무현 정부 당시 특별법을 제정해 공식 인정받은 규모만 21만 8639명에 이른다.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대법정을 나와 울먹이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대법정을 나와 울먹이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대위변제가 추진될 경우 배상 대상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승소한 피해자와 현재 소송을 진행중인 피해자, 즉 ‘①+②’로 한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위변제라는 개념 자체가 법원 판결 등을 통해 채권에 해당하는 배상 권한을 획득하는 경우에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 소식통은 “대위변제시 그 대상은 법적으로 배상 권한을 확보했거나,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며 “만일 소송을 진행하지 않은 피해자를 모두 포함한다면 이는 대위변제가 아닌 ‘포괄적 지원’이 된다는 점에서 근거도, 명분도 부족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현 시점에서 강제징용 피해자의 추가 제기 소송은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 시효 3년이 지났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강제징용과 같은 반인권적 과거사 사건에 대해선 청구권 소멸시효를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②‘재원 마련’도 첩첩산중

대위변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선택지는 ▲정부 예산 ▲한·일 기업 자발적 출연 ▲한·일 국민 성금 등이 있다.

이 중 정부 예산을 투입해 재원을 마련할 경우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 측이 대신 이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양국 국민의 성금은 규모를 쉽게 추산하기 어렵단 점에서 이런 방식을 택하더라도 재원 마련의 주축이 아닌 ‘+α’의 성격을 띨 가능성이 크다. 결국 재원의 상당 부분은 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을 통해 마련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선 포스코·KT&G·한국도로공사 등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받은 자금으로 수혜를 입은 기업·기관이 기금 출연의 주축이 될 수 있다. 포스코의 경우 2012년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을 위해 100억원 기부를 약정했고, 현재 60억원을 출연해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을 바탕으로 한 기금 조성이 추진될 경우,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 기업의 참여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간판. [연합뉴스]

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을 바탕으로 한 기금 조성이 추진될 경우,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 기업의 참여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 간판. [연합뉴스]

기업이 주축이 될 경우 대법원 판결의 피고인 미쓰비시중공업·일본제철 등 전범 기업들이 출연에 참여할지가 핵심이 될 수 있다. 이들이 대위변제를 위한 재원 마련에 참여할 경우 대법원 판결에 따른 배상은 아니지만, ‘간접 배상’에 나섰다는 명분이 마련되거나 화해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이외에도 재일동포 사업가나 한국과 긴밀한 사업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기업 등에서도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출연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대위변제를 추진해 자발적 출연금을 조성한다면 일본 정부는 관련 기업들이 기금을 출연하는 걸 막거나 반대하진 않는다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며 “다만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이 끝난다는 일본의 입장을 감안했을 때 일본 기업이 징용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출연하는 과정에서 주주들이나 이사회가 이를 ‘배임’으로 해석해 반대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③형평성 논란

정부는 앞서 1875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금과 지원금을 지급했다. 1975년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 사망자 유족에게 1인당 30만원씩 총 91억원을 보상했다. 노무현 정부였던 2007년엔 이런 보상이 충분치 않았다는 판단 아래 7만2631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로금·지원금 명목으로 6184억원을 지급했다.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뒤뜰에 위치한 원폭 피해자 1145명의 위패. [중앙포토]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 뒤뜰에 위치한 원폭 피해자 1145명의 위패. [중앙포토]

대위변제 방식을 적용할 경우 대상 설정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 있다. 배상 판결을 받지 않은 피해자들을 지급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정부 차원에서 특정 과거사 피해자에게 세 차례에 걸쳐 지원금·배상금 등의 현금을 지급하는 게 될 수 있어서다. 이는 다른 과거사 및 강제동원 피해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국가 폭력에 대한 정부의 보상을 보훈 정책 차원에서 놓고 본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대위변제가 추진될 경우 강제징용 피해와 동일한 형태의 국가 폭력을 경험한 사할린 동포나 원폭 피해자와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쟁점을 우선 내부적으로 조정하고 최종적인 해법을 도출하려면 별도의 기구가 필요하단 의견도 나온다. 어떤 해결방식을 택하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모종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는 “정부가 현인회의와 같은 협의체를 구성해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발표하면,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현금화 절차가 동결되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현인회의에서 결과물이 마련된 이후 강제징용 피해자를 상대로 충분한 설명과 설득 작업을 이어가 완결성 있는 해법을 도출한다면 일본을 상대로 제대로 된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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