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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글씨에 그림까지…이어령이 남긴 ‘눈물 한 방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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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어령 선생.

이어령 선생.

“40년 만에 처음으로 손 글씨를 쓴다. 컴퓨터 자판으로 써왔는데 이제 늙어서 더 이상 더블클릭도 힘들게 되면서 다시 옛날의 손 글씨로 돌아간다. 처음 글씨를 배우는 초딩 글씨가 될 수밖에 없다.”

올해 2월 세상을 떠난 이어령(1934~2022) 선생이 2019년 노트에 적은 ‘아무렇게나 쓰자’라는 제목의 글이다. ‘초딩 글씨’라고 자평한 선생은 제목 옆에 ‘손글씨를 쓸 때마다 늘 미안하다. 한석봉의 어머니에게’라고도 적었다.

눈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뜻하지 않게 쓰게 된 손 글씨는, 하지만 놀라운 경험도 불렀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아련한 기억이 돌아온다. 지렁이 지나간 글씨 하나마다, 추웠던 겨울의 문풍지 소리, 원고지를 구겨서 발기발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던 소리. 찹쌀떡 사려! 문을 열고 나가면 골목의 어둠만 있던 자취생활 방, 글씨 모양, 가지각색의 필적이 슬픈 기억 속에서 콩나물시루처럼 자란다.”

선생이 손 글씨로 직접 쓴 생애 마지막 기록이 『눈물 한 방울』(김영사)로 출간됐다. 노트 한 권에 2019년 10월부터 별세 한 달 전인 2022년 1월까지 쓴 글 147편 중 110편을 골라 실었다. 특유의 번득이는 사유, 죽음과 삶에 대한 성찰과 회한 등이 때로는 에세이처럼, 때로는 시처럼 흐른다.

글에 곁들여 직접 그린 그림도 있다. 예컨대 ‘생각은 언제나 문명의 속도보다 늦게 온다’는 글에는 ‘자동차가 생겨나도 그 힘을 재는 것은 말이다’ ‘전등이 생겨나도 그 밝기를 나타내는 단위는 촛불이다’ 같은 문장과 함께 색칠한 촛불, 말이 그려져 있다.

28일 간담회에서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이어령 선생은 40년 전부터 컴퓨터를 써서 육필원고가 많지 않다”며 “정말 감동한 것은 육필원고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선생은 글쓰기조차 쉽지 않을 때는 녹음을 했지만, 성량이 줄어 그조차 힘든 순간도 왔다.

신간 『눈물 한 방울』은 고 이어령 선생이 2019년 10월~2022년 1월 쓴 육필 원고를 묶었다. [사진 김영사]

신간 『눈물 한 방울』은 고 이어령 선생이 2019년 10월~2022년 1월 쓴 육필 원고를 묶었다. [사진 김영사]

고세규 김영사 대표는  올해 1월 초 선생 연락을 받고 찾아가 노트를 본 일을 돌이키며 “‘내가 사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한다면 책을 만들어보라’고 하셨다”며 “제목도 미리 ‘눈물 한 방울’로 정해두셨다”고 전했다. 책에는 암 선고에도 울지 않던 그가 어머니 영정 앞에서 통곡했던 일 등 눈물 이야기 10여 편도 실려 있다.

책에는 지성계 거인의 고독하고 내밀한 모습과 함께 생의 마지막까지 치열한 사유와 읽고 쓰기를 갈망했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하나님 제가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까닭은, 저에게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쓴 날도, ‘책들과도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되어서/ 최고사령관이 부대의 사열을 하듯/ 서가의 구석구석을 돌았다’라고 쓴 날도 있다.

“한 발짝이라도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자./ 한 호흡이라도 쉴 수 있을 때까지 숨 쉬자./한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하자./ 한 획이라도 글씨를 쓸 수 있을 때까지 글을 쓰자./ 마지막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사랑하자./ 돌멩이, 참새, 구름, 흙 어렸을 때 내가 가지고 놀던 것,/ 쫓아다니던 것, 물끄러미 바라다본 것./ 그것들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었음을 알 때까지/사랑하자.”(2021.8.1)

강인숙 관장은 “1주기인 내년께 서재를 공개하려 한다”며 “(출간한 육필원고 외에도) 책으로서보다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메모도 많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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