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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센 연극이 구닥다리? 세월호 등 사회문제 꿰뚫어봤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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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19면

[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국내 첫 입센 전집 번역한 김미혜 교수

국내 최초의 헨리크 입센 희곡 전집을 번역 출간한 연극평론가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 노르웨이 원어 번역과 출간에 15년이 걸렸다. 전민규 기자

국내 최초의 헨리크 입센 희곡 전집을 번역 출간한 연극평론가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 노르웨이 원어 번역과 출간에 15년이 걸렸다. 전민규 기자

우란문화재단에서 공연중인 연극 ‘인형(들)의 집’(각색·연출 우현주)은 놀라운 무대다. 19세기 노르웨이 극작가인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인형의 집’을 재해석한 잔잔한 연극인데, 마치 팬덤이 깔린 뮤지컬 객석처럼 커튼콜에 일제히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다. 요즘 우리 사회에 첨예한 젠더 갈등의 본질을 가장 작은 단위인 부부 관계에서 도출해내며 큰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각색도 탁월하지만, 마치 21세기 한국 사회를 19세기 북유럽 작가가 통찰하고 있는 듯해 감탄스럽다.

‘현대극의 아버지’ 입센은 전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극작가인데, 특히 ‘사회문제극’이란 장르를 연 것으로 평가 받는다. 세월호 참사를 예견한 듯한 ‘사회의 기둥들’(2014),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연상시켰던 ‘민중의 적’(2016), 장미대선과 절묘히 맞아떨어졌던 ‘왕위주장자들’(2017) 등 국내에 소개됐던 무대들도 현대사회를 꿰뚫어보고 있다. 하지만 세계 연극사에서의 위상에 비해 한국에선 영 찬밥 신세다.

연극평론가 김미혜(74) 한양대 명예교수가 국내 최초의 헨리크 입센 전집(연극과 인간) 10권을 번역 출간한 건 그래서다. 2006년 입센 서거 100주기에 시작된 프로젝트로, 노르웨이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했기에 진행이 더뎠다. 코로나 시국에 2년간 ‘집콕’하며 책상 앞을 떠나지 않은 덕에 속도가 붙었지만, 이석증과 오십견이 따라 붙었다. 요즘 핫한 작가가 아니라 출간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구닥다리 왜 하냐’라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관과 노르웨이 해외 문학 기금에 적극 어필해 받은 지원금에 자비 1000만원을 보태 책을 냈다.

“바보들의 행진 1등감이죠. 학교에서 업적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영리하게 살았다면 몸 상해 가면서 할 일이 아닌데. 그래도 흐뭇한 건 내가 영문과를 나와서 빈에서 연극 공부를 했으니 영어와 독어를 마스터했고 불어와 일본어도 좀 하는데, 노르웨이어 원전까지 번역했다는 거죠. 이 나이에 또 하나의 언어에 도전한 걸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해요.”

그의 15년 대장정은 우울함과 창피함에서 시작됐다. 2006년 베를린에서 열린 입센 국제 콘퍼런스에 한국 연극학회장 자격으로 참석할 때만 해도 입센에 무관심했던 그다. “27개국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서 하는 입센 공연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자리였는데, 한국은 입센을 다루지 않으니 낄 수가 없어 우울하더군요. 유학시절 비중있게 배웠던 기억이 나서 바로 노르웨이로 달려갔죠. 전세계의 입센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입센 연구소에 가니 일본, 중국 자료도 있는데 한국 것만 없는 거예요. 문명국으로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너무 중요한 작가를 우리만 놓치고 있는 거니까요.”

연극 ‘인형(들)의 집’. 배우 이석준(왼쪽)과 임강희가 주연을 맡았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연극 ‘인형(들)의 집’. 배우 이석준(왼쪽)과 임강희가 주연을 맡았다. [사진 우란문화재단]

학생들이라도 공부하게 하자는 생각에 ‘국내 1호 입센 연구자’를 자처하며 영어와 독일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어본과 독어본 사이에 뉘앙스 차이가 느껴지니 작가적 시선에서 지나칠 수 없었다.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같은 세계적 작가들이 입센을 읽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웠다는 말이 이해가 됐어요. 원전이 너무 궁금한데, 노르웨이어는 배울 루트가 너무 없으니 영어 교본을 사서 독학했죠. 워낙 언어 공부를 좋아하기도 하고, 다행히 영어, 독어 단어들이 섞여 있고 섬세한 언어는 아니더군요. 이런 언어로 대문호가 됐으니 더 위대한 거죠.”

노르웨이어는 스웨덴어, 덴마크어와 함께 ‘스칸디나비아어’로 취급되는 작은 언어다. 국내 소개됐던 ‘인형의 집’ 등 대표작들도 영어나 독어본을 중역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작은 언어로 ‘현대극의 아버지’ 위상을 얻었을까. “노르웨이는 19세기까지 수백년간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탓에 입센 시대에는 ‘노르웨이 문화’ 조차 없었어요. 노르웨이를 벗어나 이탈리아, 독일 같은 문화예술 선진국에서 대작을 써서 인정받았죠. 그가 작품을 낼 때마다 독일인들이 열광했고, 독일인들은 자기 나라 사람처럼 입센 사랑이 지극해요. 서거 100주년 콘퍼런스가 오슬로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열린 이유에요. 이민자들의 지지도 컸죠. ‘인형의 집’도 시카고 이민자들 앞에서 노르웨이어로 초연된 이후 명성을 얻었으니까요. 나라가 후져서 세계적 작가가 못되는 건 아니에요. 정말 잘 쓰면 번역가들이 달려들게 돼 있죠.”

그가 입센에 더욱 매혹된 건 작품 속 인물들의 숭고한 정신 때문이다. 번역 과정에서 직접 제안해 무대가 성사된 ‘사회의 기둥들’ 같은 사회문제극은 오히려 스케일이 작은 편이다. 그가 진짜 로망을 품은 건 방대한 스케일의 레제드라마 ‘브란’이다. “브란은 목사인데, ‘올 오어 낫띵’이 삶의 모토인 사람이에요. 세상과 절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명에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이죠. 나도 좀 그런 성격이라 울면서 번역했어요. 그렇게 살면 얼마나 인생이 고단한지 아니까. 레제드라마긴 해도 언젠가 꼭 공연이 되면 좋겠어요. 정신이 싸구려가 된 시대에 이런 인생도 가치있다는 걸 사람들이 좀 알아야 되요.”

그의 말처럼 한없이 가벼워진 지금 시대에 입센이 젊은 연출가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디지털 시대에 입센이 아니라 연극 자체가 ‘구닥다리’로 치부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센이 가진 주제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앙가주망은 배울게 많거든요. 400년된 셰익스피어에게 인생을 배우잖아요. 종교조차 인간의 영혼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처럼 살아있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는 게 연극이거든요. 선진국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전부 국립극장 회원일 정도로 연극이 생활의 일부인데, 우리는 그런 문화가 없으니 교육부터 나서야죠. ‘연극치료’라는 게 왜 있을까요. 연극이 사람을 바꾸는 효용에 대한 국가의 인식이 없으면, 이런 시대에 연극은 고사하게 될 겁니다.”

15년 대장정을 끝내고 입센을 털어냈지만, 그는 여전히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소녀였다는 그의 진짜 숙원사업은 이제부터다. “소설을 쓰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하면 팍삭 할머니가 될테니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야죠. 배우 이영애가 내 사랑하는 제자인데, 영애를 머릿속에 캐스팅해 한 여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내 자전적인 내용도 좀 들어가고. 모르죠, 언젠가 진짜 이영애가 출연하는 드라마가 나올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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