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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통신선 복원 뒤에도…피살사건 전통문 한 장도 안보냈다

중앙일보

입력

북한이 지난해 8월 10일 한미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일방적으로 단절했던 남북통신연락선이 복원된 10월 4일 군 관계자가 남북 군 통신선 시험통화를 하는 모습. 국방부 제공,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해 8월 10일 한미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일방적으로 단절했던 남북통신연락선이 복원된 10월 4일 군 관계자가 남북 군 통신선 시험통화를 하는 모습. 국방부 제공, 연합뉴스

정부가 지난해 남북 간 통신선을 복원한 뒤에도 해양수산부 공무원 고(故) 이대준씨 피살사건 조사와 관련해 북한에 전통문 한 장도 보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2020년 9월 사건 발생 직후 정부는 북한에 공동조사 및 군 통신선 복원을 요청하는 게 진상 규명을 위한 적절한 대응이라는 취지로 국민에게 설명했는데, 정작 대화 통로가 뚫린 뒤에는 이를 우선순위로 삼지 않은 셈이다.

정부 당국자는 20일 중앙일보에 "남북대화가 재개되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이씨 피살 사건에 대해 논의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다"면서도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통신선이 복원됐는데, 이후 북측에 이씨 피격 사건과 관련한 전통문을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난해 7월 27일 통신선을 복원했다.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며 14일 만인 8월 10일 끊었고, 약 두 달 뒤인 지난해 10월 4일 다시 연결했다. 하지만 정부는 7~8월 연락선이 잠시 복원됐을 때도, 다시 연결된 10월 이후에도 북측에 이씨 피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기본적인 실무 요청도 하지 않은 셈이다.

이는 '사건의 명확한 파악을 위해서라도 통신선 복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문재인 정부가 실제 관련 노력을 충실히 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난해 7월 통신선이 복원됐을 때도 정부의 이씨 피살사건 관련 공동조사 요청은 없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관계 개선과 발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면서도, 이씨 사건과 관련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건 직후 "규탄", "책임자 엄중 처벌"을 주장했던 정부의 태도는 이씨가 피살된 지 사흘 만인 2020년 9월 25일 북한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과 내용이 담긴 대남통지문을 보내오자 확연히 달라졌다.

9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한 뒤 청와대는 "북측의 신속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며 "조속한 진상 규명을 위한 공동조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또 "이를 위한 소통과 협의, 정보 교환을 위해 군사통신선의 복구와 재가동을 요청한다"고 했다.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대책 요구'에서 '공동조사를 위한 통신선 복원 요청'으로 방점이 옮겨갔다.

하지만 정부가 이에 따른 후속 조치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일각에서는 결국 국민이 북한군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건을 통신선 복원의 명분으로 삼으려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남북 간 통신선 재복원은문 대통령이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지난해 9월 21일)에서 '종전선언'을 다시 제안하며 임기 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직후에 이뤄졌다. 문 대통령은 당시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나흘 뒤인 9월 25일 담화를 통해 "종전선언은 흥미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뒤이어 김정은도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제14기 5차) 시정연설에서 "10월 초부터 관계 악화로 단절시켰던 북남(남북)통신연락선들을 다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이런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종전선언의 동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중시한 나머지 북측이 불편해할 만한 논의는 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남북 정상은 지난해 통신선 복원 이후 공개된 것만 해도 두 차례에 걸쳐 친서를 교환했다. 정부는 관례에 따라 친서의 전문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개된 주요 내용을 보면 이씨 피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양 정상은 덕담을 주고받았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남북대화 복원이나 종전선언 추진을 위해 정부가 이씨 피살 사건에 대해 상당히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해당 사건을 계속 제기할 경우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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