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E SOCIETY
2014년 5월 15일, 테드(TED) 강연자로 방콕 출신의 농(Nong Punsukwattana)이 무대에 올랐다. 농은 몇 해 전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단돈 17달러를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었다. 언니가 3백 달러를 손에 쥐어줬지만 인천공항에서 환승하면서 샤넬상품을 사느라 모두 썼다고 했다. 이후 오리건 주의 여러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중고 팝콘 카트를 구입, 푸드 트럭을 시작했다. 오늘날 전설이 된 ‘농의 카오 만 가이(Nong’s Khao Man Gai)’다, 메뉴는 ‘삶은 닭과 밥’ 하나다. ‘마약 치킨’으로 불리고, 포틀랜드에서의 단 한 끼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손꼽는 음식이다. 지역 사람들은 그녀를 ‘셰프 농’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한다.
이 성공 스토리와 함께 소개하고 싶은 내용은 푸드 트럭이 위치한 공간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푸드 트럭 문화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멋지게 만든 곳이 포틀랜드다. 독특한 점은 푸드 트럭들이 도심의 노천 주차장 가장자리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도심의 공터가 차들로 가득 차있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길거리에 푸드 트럭이 무질서하게 나열된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빈티지 자동차를 개조한 예쁜 트럭들이 주차장을 둘러쌈으로써 두 가지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것이다. 길거리 음식문화와 소상인들, 환경디자인을 지혜롭게 풀어낸 걸작 행정이다. 오늘날 도시환경을 이야기할 때 공연히 포틀랜드를 모범도시로 손꼽는 것이 아니다. 공공디자인에도 수준과 품격이 있다.
예쁜 푸드트럭, 도심 주차장 가장자리 배치
공공디자인이란 시민들의 일상적 행위를 위해서 계획된 예술적 하드웨어다. 대표적인 예로 광장이나 공원, 미술관이나 도서관 등의 공공건물, 기차역, 버스정류장, 벤치와 같은 시설물, 그리고 환경예술이 있다. 일반적으로 거리를 다니면서 얻게 되는 정보들은 보통 상업적이다. 즉 우리에게 무언가를 팔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공공디자인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고 한다. 그건 잠깐의 휴식, 작은 기억, 또는 예술적 인식일 수도 있다. 1980년대부터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공공디자인은 오늘날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많은 도시들이 경쟁하듯 이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관람할 때는 통제된 공간에서 의도된 동선에 따라 옮겨 다니게 된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은 예기치 못했던 환경에서 다가오고, 또 우리에게 대화를 청한다. 그러면서 건전한 사회적 교류를 기대한다. 특히 옥외의 공공장소들은 일상에 매우 가깝게 위치한다. 길을 걷다가 쉴 수 있는 곳, 일상의 흐름에서 살짝 벗어나는 곳, 그런 멈춤을 위해서는 잘 계획된 디자인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길거리와 연결된 부분으로부터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 접근성과 물리적 편리성이 중요하다. 공익을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에서도 특히 강조하는 요소다. 다음으로는 포용성과 다양성이다. 공공장소는 여러 목적과 사용 용도를 지닌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는 않지만 각자 원하는 행위는 다르다. 이를 수용하도록 계획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냥 지나가게 돼 있다. 시각적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술적 율동과 세련된 감각, 하나의 디테일과 질감을 보고 감격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져야 한다. 밀집한 도시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하는 만큼 자연과의 접촉은 필수다. 그늘을 제공해주고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녹지를 마련하면 좋다. 계절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되어도 좋다. 새벽에 운동, 이른 아침에 비즈니스 미팅, 오전의 산책, 오후나 저녁엔 연인들의 데이트, 간혹 작은 공연들… 이런 다양한 행위를 포용할 수 있는 장소는 성공적이다. 물론 안전성과 치안은 기본이고 꾸준한 관리도 필요하다. 이렇게 잘 디자인된 공공장소들은 기능적 가치 이외에 심미적, 상징적 가치도 갖는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경제적 가치다. 사람들이 모이면서 주변의 상업이 활성화되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점이다. 큰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은 경제 전반에 기여를 하지만 공공장소는 소상공인들의 장사에 기여한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파리의 퐁피두센터(Pompidou Centre) 광장, 뉴욕의 하이라인(Highline)과 같은 공공장소들은 모두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도시의 이미지가 향상되고 사회적 역동성, 지역의 정체성과 더불어 문화적, 경제적 가치가 창출된다. 사회 전체가 디자인을 통하여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의 창조는 필수적이다. 공공디자인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공공장소는 인터넷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타인들과 연결된 공간이다. 당연히 권리와 의무, 예의가 동반된다. 이는 다분히 상식적인 내용들이다. 공공장소에서는 자유롭게 거닐고 휴식이나 사교, 사진촬영을 할 수 있다. 장소에 따라서, 허가를 얻으면 거리 공연을 할 수도 있다. 동시에 이런 권리를 즐기는 다른 사람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깨끗이 사용해야 하고 큰 소리의 핸드폰 통화나 주의를 끄는 행동, 흡연은 자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안 되고 지나치다가 어깨를 부딪쳤을 경우 가볍게 사과하는 편이 좋다. 타인이 즐기는 시간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며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의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상호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시민들 큰 돈 안 들이고 ‘문화적 사치’ 누려
공공디자인은 모두가 조금씩 누릴 수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일부의 사람이 모든 걸 누리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민이 누려야 할 장소를 장기간 독점하는 시위나 집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소음을 야기하고 도시의 모습을 해친다. 집회를 할 경우에는 사전의 허가를 받고, 가급적 조용히, 적은 규모로, 짧게 해야 한다. 차량과 행인의 통행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가로막과 인쇄물의 설치와 부착으로 야기되는 시각적 공해다. 많은 사람의 노력과 막대한 예산을 들여 조성한 도시 환경을 소수의 이기심이 망치는 행위다. 가장 민주적으로 공평하게 사용될 공간이 이렇게 추하게 사용되는 건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회적 변화와 새로운 정책, 테크놀로지와 교통수단의 발달로 도시는 매일 조금씩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잘 만들어진 공공장소에 대한 요구와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이 큰 돈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다. 좋은 디자인은 예기치 못한 장소들을 새로운 곳으로 탈바꿈시키고 도시에 활력을 일으키는 마력을 발휘한다. 심지어 그 도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방문해도 초대받는 느낌을 준다. 성공적인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의 가장 큰 차이는 공공디자인에 대한 인식과 이용 방식이다.
아무리 훌륭한 무대 디자인도 배우가 들어가서 연기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훌륭한 연극도 관객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공공장소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 공간을 아끼고 경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되고, 사람들과의 교감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특정 장소를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곳을 방문하고, 방문해서는 무엇을 느끼며, 어떻게 머물고 돌아가는지는 더욱 중요하다. 공간만 만들고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면 쉽게 외면당한다. 공공디자인이 후진 도시는 사람을 끌지 못한다. 도시의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높은 시민의식, 환경에 대한 존중, 사람에 대한 예의와 공중도덕이 필수적이다. 그랬을 때 그 공간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그런 장소를 갖는 도시는 문화적 슈퍼 타운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공간미식가』,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