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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골목길 산책 ‘플라노’ 시대 초월한 감성을 느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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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호 24면

POLITE SOCIETY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inia) 섬 칼리아리(Caglianri)의 뒷골목. 플라노는 큰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지적유희다. [사진 박진배]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inia) 섬 칼리아리(Caglianri)의 뒷골목. 플라노는 큰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지적유희다. [사진 박진배]

몇 해 전 도쿄에서 한식연구가 한복진 교수와 저녁을 함께했다. 식사를 마치고 교수님은 “나는 숙소로 돌아갈 테니, 젊은 분들은 ‘긴부라’하시다 가세요”라며 인사를 하셨다. 긴부라(銀ブラ). 2차대전 패망 직후 커피가 비싸던 시절, 일부 부유층들이 긴자에서 커피를 마시고 뒷골목을 배회하던 행태에서 유래한 단어다. 말 그대로 긴자(銀座)를 ‘부라부라’ 흐느적거리며 다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긴자 뒷골목을 산책하고 구경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런 행위를 뜻하는 원조 단어가 있다. 프랑스어 ‘플라노(flâneur)’다. 1840년대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가 처음으로 쓴 표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개념은 독일 철학자인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글에서도 반복된다. 그리고 런던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는 화자(話者)가 전달하는 형식으로 쓴 에드거 앨런 포의 『군중속의 사람(The Man of the Crowd, 1845)』에서도 등장한다. ‘길거리 신사의 유모차’라는 뜻으로 사실 다른 나라 말로는 번역이 잘 안 된다. 의역을 하자면 ‘거리를 배회하는 산책자’, 골목을 천천히 거닐며 풍경을 감상하는 행위를 뜻한다.

플라노는 근대사회가 도래하면서 태어난 개념이다. 도심의 번잡한 시스템과 자본주의에 대한 무관심한 마음의 상태가 기본이다. 그래서 대로변을 벗어나 도심 뒷골목의 겸손한 생활을 보고 내면의 깊이를 찾는 작업이다. 플라노를 주제로 쓰인 책도 많이 출판되었다. 단어가 예술적이고 보헤미안 적인 느낌이 있어 그 이름을 딴 전시, 레스토랑, 건축사무실, 그리고 카페, 와인 브랜드도 있다.

프랑스어 ‘길거리 신사의 유모차’ 뜻

칠레 발파라조(Valparaíso)의 골목. 플라노는 바닥의 질감을 느끼며 도시의 미로(迷路)를 탐험하는 것이다. [사진 박진배]

칠레 발파라조(Valparaíso)의 골목. 플라노는 바닥의 질감을 느끼며 도시의 미로(迷路)를 탐험하는 것이다. [사진 박진배]

플라노는 도시미학을 관찰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도시의 시각적 풍요로움을 세밀하게 즐기는 데는 골목만한 공간이 없다. 넓고 반짝이는 대로변에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질감과 감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불규칙성이다. 건물이나 담벼락, 발코니의 줄이 맞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창호나 문짝이 제각기인 점도 매력이다. 폭도 넓지 않고 들쑥날쑥 하지만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의 대비가 있다. 초미니 광장이 생기기도 하고, 몇 단의 계단과 완만한 경사지도 있다. 결코 단조롭지 않은 풍경이 계속된다. 미적 관능주의를 추구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골목길은 처음 형성된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공간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이런 골목길의 가치를 인지해 보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필라델피아는 1703년부터 남아있는, 미국에서 가장 오랜 된 ‘엘프레쓰 골목(Elfreth’s Alley)’을 대표적인 유산으로 홍보하고 있다. 2011년 칸영화제 개막작품인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하는 포털도 파리의 뒷골목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골목은 영화 해리포터의 ‘디아곤 골목(Diagon Alley)’의 영감이 되었던 요크(York) 시의 ‘샴블즈 골목(Shambles of York Alley)’일 것이다. 과거 도축업자들이 모여 있던 길로 현재 전 세계의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다.

덴마크의 리베(Ribe). 골목에는 나름의 주인이 있다.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나 벽면에 놓은 자전거도 골목의 주인이다. [사진 박진배]

덴마크의 리베(Ribe). 골목에는 나름의 주인이 있다.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나 벽면에 놓은 자전거도 골목의 주인이다. [사진 박진배]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그리고 도심재생의 파괴로부터 살아남은 골목을 걷는 것은 아날로그로 즐길 수 있는 지적 놀이다. 거리를 성공적으로 만들었다면 도시의 삼분의 일은 잘 디자인한 것이다. 뒷골목이 재미있다면 그 도시의 내공은 대단한 것이다. 파리와 런던은 이 둘을 모두 가진 대표적인 도시다. 훌륭한 환경디자인은 이런 소소한 것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디테일에 있다. 이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생각을 가지고 지켜왔어야 현시점에서 향유할 수 있는 자산이다.

플라노의 핵심은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삶에 끼어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망하며 그 자체를 존중하는 자세다. 마치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사람은 동물의 세계에 절대 개입하지 않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골목은 보통사람들의 공간이다. 보이지 않지만 나름의 주인이 있다. 골목의 양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바닥을 쓸고, 가게 주인은 화분이나 의자를 내다 놓으면서 환경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심지어는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 앉아 있는 고양이나 벽면에 놓인 자전거도 골목의 주인이다. 이 공간은 그들의 살롱이다. 플라노를 하는 우리는 잠시 들렸다 가는 손님일 뿐이다.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잘 감상하고 떠나면 된다.

미국 메인(Maine)주 포틀랜드 시의 뒷골목. 골목은 보통사람들의 공간이다. [사진 박진배]

미국 메인(Maine)주 포틀랜드 시의 뒷골목. 골목은 보통사람들의 공간이다. [사진 박진배]

골목길에서는 군중을 만날 일이 없다. 일상의 중요한 일이 많은 바쁜 사람들은 우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은 누구와의 시간 약속을 하는 장소도 아니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지만, 스치는 모습만 봐도, 눈빛만 교환해도 나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걸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과 짧게 공유하는 시간에 대한 예의는 필수다. 손에 든 휴대폰은 비행기모드로 바꾸는 게 좋다. 자신의 산책도, 타인의 산책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도시를 보는 최고의 방식’이라는 플라노는 조깅이나 쇼핑처럼 목적이 있는 발걸음이 아니다. ‘산보(散步)’라는 단어의 뜻처럼 그야말로 ‘흩어지는 걸음’이다.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 바닥의 질감을 느끼며 도시의 미로(迷路)를 탐험하는 것이다. 전문가처럼 디코딩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아마추어답게, 보이는 것, 느끼는 걸 즐기면 된다. 처음에는 표면적인 것만 보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깊이와 심오함이 저절로 다가온다.

소소하지만 매력 있는 이야기 넘쳐

프랑스 알자스 지방 에귀샤임(Equisheim). 이곳에서 다른 사람과 짧게 공유하는 시간에 대한 예의는 필수다. [사진 박진배]

프랑스 알자스 지방 에귀샤임(Equisheim). 이곳에서 다른 사람과 짧게 공유하는 시간에 대한 예의는 필수다. [사진 박진배]

골목을 걷는 것의 매력은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별한 장대함은 없지만 소소한 것들로 채워져 있어 실시간 다채로운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골목길은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진 장소다. 서로를 마주보는 연인, 중년들의 차분한 대화, 자신을 알아보는 이웃 강아지의 반가운 꼬리침 등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과 같다. 골목은 그 퍼포먼스의 근사한 무대다. 우리 인생의 많은 경우는 이렇게 작은 것, 소소한 것이 큰 과업이나 성취를 능가하는 기쁨을 준다. 예기치 않게 빵 굽는 냄새를 맡거나 예쁜 상점의 입구를 만나는 일도 있다. 아주 행복한 순간이다. 그럴 때는 목적 없는 발걸음이 작은 가게나 커피하우스를 향하기도 한다. 그 휴식도 플라노에 포함된다.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쉬었다가는 인생을 닮았다. 확실한 것은 그렇게 향하는 곳이 대로변의 스타벅스나 샤넬매장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 ‘마이페어레이디’의 ‘당신이 사는 이 거리에(On the Street Where You Live)’ 노래 가사처럼, 어떤 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특별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안 보이던 라일락 나무가 보이고, 새소리가 들리면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샘솟는다. 그러면서 감각적 예민함과 예술적 감성을 경험한다. 이렇게 특별한 목적이 없이 걸을 때 사업적 아이디어나 철학적 깨달음이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배우고 즐기면 충분하다.

프랑스 르와르(Loire) 지방의 암보아(Amboise). 골목길은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박진배]

프랑스 르와르(Loire) 지방의 암보아(Amboise). 골목길은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사진 박진배]

플라노는 큰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지적유희다. 어떤 행태의 설명을 위해서 만들어진 단어가 이제는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건 세상을 보는 법이고 이데올로기며, 하나의 세계관이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접어드는 순간은 일상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다. 오늘 자동차 열쇠를 집에 두고 골목을 찾아 아주 심플한 하루를 보내자. 거기에 시대를 초월한 감성의 가치가 존재한다. 플라노 중에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존재의 이유)’가 떠올랐다면 이는 스스로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는 순간이다.

1994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에서 시(詩)를 쓰고 싶다고 묻는 집배원에게 파블로 네루다가 해준 말이다. “바닷가를, 가능하면, 천천히 걸으면서 관찰해라”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공간미식가』,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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