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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 오죽 급했으면…바이든, '암살 배후자'에 손 내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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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2011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당시 왕세자였던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과 만났다.[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부통령이던 2011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당시 왕세자였던 살만 빈 압둘아지즈 현 국왕과 만났다.[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MBS) 왕세자와 면담할 예정이라고 백악관이 14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반체제 언론인 암살 배후로 보고 사우디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이 나라와 거리를 둬왔다.

하지만 최근 유가 급등과 40년래 최고 인플레이션이 미국 경제를 흔들자 최대 원유생산국인 사우디를 직접 찾아가는 고육지책을 내놓았다. 중국산 상품에 부과 중인 고율 관세도 일부 철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결국 경제 안정을 위해 인권, 중국과의 경쟁 등 바이든 행정부가 무게를 두는 가치를 일부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바이든 대통령이 다음 달 13∼16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등 중동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먼저 13~14일 이스라엘을 방문해 나프탈리 베네트 총리와 정상회담한 뒤 사우디로 이동해 걸프협력회의(GCC)+3(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사우디에서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과 만나고, MBS와 별도 만남이 예정돼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MBS 왕세자가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였던 사우디계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에 관여했다고 본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반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사우디를 "왕따(pariah)"로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고립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사우디는 “거의 80년 동안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장피에르 대변인)이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접촉을 최소화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왕과 별도로 MBS 왕세자와 면담하는 것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기름값 고공행진을 막기 위해 사우디에 대한 정책 전환을 시사한다. 바이든 대통령의 사우디 방문이 고유가 대응 차원이냐는 질문에 장피에르 대변인은 "에너지 문제가 중요 이슈지만 유일한 이슈는 아니다"라며 사실상 인정했다.

하지만 양국 관계를 얼어붙게 만든 요인인 반인권적 상황에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MBS 왕세자와 만나는 것이 확정되면서 바이든 행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한 발짝 물러선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에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백악관의 숙제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미국은 왕세자를 사우디계 반체제 언론인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미국은 왕세자를 사우디계 반체제 언론인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MBS 왕세자 면담 때 카슈끄지 암살 문제를 인권 문제 차원에서 거론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바이든 대통령이 MBS 왕세자에게 직접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인지를 묻는 말에 장피에르 대변인은 “대통령은 취임하기 전에 일어난 어떤 행위에도 눈감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인권 문제는 항상 대외문제 대응에서 대화의 한 부분이었으며 대통령이 누구와 대화하느냐와 무관하게 항상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으로 기름값이나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시각이다. 세계 1위 원유 생산국 사우디가 증산을 결심하더라도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 수입 중단 조치가 올해 말 시행 예정이어서 당분간 유가 하락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미국과 EU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로 러시아 주요 수출품목인 화석연료 수입을 제한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에서 회복하면서 원유 수요가 급증했는데, 세계 3위 원유 생산국인 러시아의 공급이 막히면서 유가가 가파르게 올랐다. 미국은 3월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전면 금지했고, EU는 5월 러시아산 원유의 해상 수입을 일부 금지한 데 이어 오는 12월 전면 금지를 시행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물가 상승 압력을 줄이기 위해 중국산 소비재에 부과하는 고율 관세를 일부 해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악시오스가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달 초 관련 장관들에게 이 같은 구상을 알렸다고 한다. 장피에르 대변인은 "이 문제는 내부적으로 논의 중인 사안"이라고 확인했다.

이르면 이달 중으로 자전거 등 일부 상품을 관세 대상에서 제외할지 결정하기 위한 절차 진행을 미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강·알루미늄 등 미국 노동자와 직접 이해관계 있는 품목은 관세 인하 품목에서 제외되고, 가정용품 등 소비재 위주가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중 무역전쟁을 벌이면서 중국산 상품 2200여개에 10~25% 고율 관세를 매겼고, 대상 품목은 2020년 초 549개로 줄었다. 지난 3월 바이든 행정부는 이 중 352개 품목에 대해 관세 부과 예외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지자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인하 요구가 있었으나,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중국의 태도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관세를 인하하는 것은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일각의 반대에 부딪혔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소비자물가가 40년 만에 최대 상승 폭(전년 대비 8.6%)을 기록하는 등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오르자 결단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관세 인하가 인플레이션 대응에 효과적일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어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정치적 타격만 입힐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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