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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울음 들어보신 분?"…10대들이 도산대로 점령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노란색 벤츠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일대에 나타나자 사진을 찍으려는 10대 등이 몰리고 있다. 채혜선 기자

노란색 벤츠가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일대에 나타나자 사진을 찍으려는 10대 등이 몰리고 있다. 채혜선 기자

지난 4일 오후 4시 30분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일대. 노란색 벤츠 C클래스 차량이 멈춰 서자 10대 남성 5명 등이 순식간에 차량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잠깐 정차했던 차량이 이내 굉음을 울리며 쏜살같이 튀어나가자 주변에서는 “와-”라는 탄성이 쏟아졌다.

카스팟팅 성지(聖地)로 떠오른 강남 도산대로

지난 4일 도산대로 일대에서 수퍼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채혜선 기자

지난 4일 도산대로 일대에서 수퍼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채혜선 기자

이는 한 외제 차 브랜드 전시장 바로 앞 도산대로 일대에서 주말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이곳이 이른바 ‘카스팟팅(Car spotting·수퍼카를 촬영하는 행위)’을 취미로 삼는 이들의 성지라서다.

이날 만난 카스팟팅을 수년간 취미로 하는 이들에 따르면 “이 일대는 교통 체증이 상대적으로 심한 서울 도로 가운데서도 차량이 직진 신호를 받아 잠깐이라도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간”이라고 한다. 평소에 보기 힘든 비싼 수퍼카들도 자주 지나간다. 그동안 카스팟팅을 위한 장비를 사는데 약 400만원을 썼다는 이모(22)씨는 “차는 전시장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굉음을 내며 달리는 수퍼카를 직접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라며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도산대로 주변을 2시간 동안 지켜본 결과 수퍼카 사진을 찍던 남성 15~20명 가운데 대다수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이었다. 이 중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다. 세종시에서 올라왔다는 40대 김모씨는 “12세 초등학생 아들이 도산대로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 이른 아침부터 구경나왔다”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차를 좋아하는 김씨 아들은 유튜브에서 카스팟팅 관련 영상을 보고 도산대로에 오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고 한다.

이날 경기도 부천 등에서 서울 구경을 왔다는 고등학생 3명은 “친구들이랑 마음먹고 서울에 놀러 온 김에 유튜브에서 유명한 장소를 직접 보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스포츠카가 커다란 배기음을 내며 질주할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와! 소리 죽인다” “내가 이 소리를 직접 듣다니”라면서다.

“힘들지만 초고가 희귀 차량 보면 뿌듯”

카스팟팅이 취미인 남우진군이 샀다는 카메라. 채혜선 기자

카스팟팅이 취미인 남우진군이 샀다는 카메라. 채혜선 기자

수퍼카가 달리는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는 고된 과정의 연속이라고 한다.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수퍼카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휴대전화 카메라 등을 켜놔야 해서다. 경남 창원에서 올라온 이모(16)군은 “카메라를 이렇게 한참 들고 있으면 팔도 아프고 힘들지만 보고 싶던 수퍼카가 지나가면 그간 고생이 다 잊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도로를 달리는 차량 종류를 대부분 맞힐 수 있을 정도로 자동차 마니아라는 이군은 “도산대로에서 람보르기니를 봤던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날 도산대로에서 만난 이들은 “쉽게 볼 수 없는 자동차의 외관이나 배기음을 직접 느끼는 게 카스팟팅의 매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일명 ‘자동차 덕후’를 자처한 남우진(17)군은 “토요일마다 서울로 올라와 수퍼카 모습을 찍는다”고 말했다. 남군은 자동차를 좋아하는 또래 4~5명과 토요일마다 도산대로를 찾아 길게는 10시간 이상을 있는다고 한다.

수퍼카 차주들도 카스팟팅에 열광하는 이들의 반응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날 몇몇 차주는 도산대로 일부 구간을 일부러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거나 친분이 있는 촬영자에게는 음료를 건네기도 했다. 한 수퍼카 차주와 인연을 공개한 A군(19)은 “자주 나오다 보면 안면이 트면서 차량을 태워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 역시 (카스팟팅의) 설렘 포인트”라고 말했다.

도산대로 카스팟팅은 10대 등 사이에서는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은 분위기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카스팟팅 관련 단체 모임이 즐비하다고 한다. 유튜브에서는 도산대로 일대를 달리는 수퍼카를 찍은 동영상도 적지 않다. 고가의 차량 사진을 직접 찍어 SNS에 올린다는 한 10대 남학생은 “인맥을 쌓기 위해서라도 수퍼카를 찍으려는 친구들이 있다”고 전했다.

인근 주민·직장인 소음으로 고통

유튜브에서 '도산대로'를 치면 배기음 관련 영상이 뜬다. 사진 유튜브 캡처

유튜브에서 '도산대로'를 치면 배기음 관련 영상이 뜬다. 사진 유튜브 캡처

그러나 이들의 이런 행위로 인근 주민 등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도산대로 근처에 사는 주민 김모(59·여)씨는 “일 년 넘게 이런 모습을 지켜봤는데, 소음도 너무 시끄럽고 어린 학생들이 고가의 수퍼카를 선망하는 게 물질주의에 빠진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15년 넘게 일했다는 50대 이모씨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커다란 배기음이 수시로 들려와 일하는데 지장이 너무 크다. 단속도 의미가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차 관련 취미다 보니 안전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이날도 수퍼카가 횡단보도 초록 불에 걸려 정지하자 도로로 쏟아져 이를 찍는 앳된 남성 대여섯 명이 눈에 띄었다. 중학생 B군은 “지난달쯤 (구청에서) 철제 울타리를 설치했지만,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차량에 받치거나 하는 행위는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사진을 찍다 보면 위험한 순간이 정말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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