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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찢어졌네" 쑥 들어온 손가락…직장 성추행, 그후 3년

중앙일보

입력

성폭력 이미지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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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김가영(31·가명)씨는 3년 전 봄 끔찍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19년 5월 직장의 체육행사가 열린 경기도 고양시 한 연수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서울의 한 은행에서 비서로 일하던 가영씨는 이날 은행 간부 A씨에게 추행을 당했다. A씨는 체육행사 후 의자에 앉아있는 가영씨에 다가갔다. “청바지가 찢어졌네”라면서 가영씨가 입고 있던 청바지의 찢어진 틈으로 손가락을 넣은 뒤 3초가량 무릎 윗부분을 만졌다고 한다. 놀란 가영씨는 즉시 자리를 떴지만, 수치심은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추행은 두 달 뒤에도 이어졌다. 부서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A씨가 앞서 걷던 가영씨에게 “살찐 데도 없구먼, 다이어트 할 필요도 없겠는데”라고 말하며 가영씨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다. 팔뚝 안쪽을 만지는 손길을 뿌리쳤지만 A씨는 가영씨의 허리를 감싸 안은 뒤 한쪽 어깨를 손으로 잡아당기며 얼굴을 들이밀었다고 한다. 충격에 잠을 못 이루던 그 날 새벽 가영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비공개로 “더러운 XX,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다른 게 미투(#MeToo)가 아니라 이런 게 미투”라고 적었다.

힘겹게 시작한 법적 소송

인천지방법원은 지난해 8월 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심석용 기자

인천지방법원은 지난해 8월 강제추행 혐의를 받는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심석용 기자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막막했다. 내 편이라 생각했던 회사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나날이 반복되면서 병가를 내야 할 정도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이 나타났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고민 끝에 변호사를 선임해 법적 소송에 나섰다.

법원은 A씨의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된다고 봤다. 2020년 인천지법은 A씨에게 벌금 600만원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을 이수하라고 명령했다. 2심 재판부는 A씨의 죄질을 더 무겁게 봤다. 지난해 7월 인천지법 제3형사부는 A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추행 내용 등에 비추어 죄질이 좋지 않은 점, 피해자가 이 사건 이후 사실과 다른 추문에 휩싸이는 등 2차 피해를 입어 퇴사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A씨의 행동이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는 모습으로 보기 어려운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민사재판으로 다시 시작한 싸움

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서울중앙지법 전경. 뉴스1

A씨와 검찰이 상고하지 않으면서 형이 확정됐지만 가영씨는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고 했다. 성추행을 당했을 때 회사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생각에서다. 이대로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도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싸움을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법률대리인을 통해 A씨와 B은행에 각각 3000만원과 20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B은행이 사용자로서 해야 할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B은행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대로 분리하지 않는 등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아 가영씨의 퇴사로 이어졌다는 주장이다.

민사재판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고 있다. B은행 측은 이 사건이 A씨 개인의 비위·일탈 행위이고 사적 영역에서 일어났으니 사무집행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추행 시점과 장소가 은행 관리권이 미치기 어려운 영역이므로 사용자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은행은 “사무집행 관련성이 인정되더라도 회사는 성희롱 예방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으므로 면책사유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가영씨의 소송을 도운 이은의 변호사는 “금융권 내 성희롱 사건 피해자들이 공론화를 주저하게 되는 이유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라고 지적했다.

지난 1월 시작한 재판은 다음 달 9일 4번째 변론기일을 앞두고 있다. 앞서 재판부는 B은행의 한 임원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사건 당시 인사부서 직원의 진술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가영씨는 이날 재판에 꼭 참석하겠다고 했다.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보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피해를 직접 설명하겠다는 마음에서다. 가영씨는 “힘에 겨운 날이 많았지만, 함께 해준 이들 덕에 계속 싸울 수 있었다”며 “앞으로 저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더는 나오지 않게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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