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되면 공작정치 탓/전육 정치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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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본지 창간 2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어느 정당지도자에 대한 응답이 호감은 두번째(10.3%),정계를 떠나야 할 사람으로 첫번째(29.3%)로 나타났다.
다른 정치지도자에 대한 반응도 모두 좋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 전반에 대해,특히 현재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적다는 뜻이었다. 아무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64%나 되는 것을 보아도 우리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조사결과에 대한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반응이 놀라웠다. 호감이 적고 물러나야 된다는 여론이 그들 생각보다 많다고 해서 이를 「공작정치」의 결과라고 어느 정당의 간부는 흥분했다.
누가 누구를 상대로 공작을 했다는 얘기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무책임하게 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민심」이라고 하고 불리한 말을 덮어놓고 「공작」이니 「음모」니 하는 표현으로 몰아붙이는 고질이 발동한 것이다.
최근 민자당 내부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할 것이냐,말 것이냐,한다면 언제부터 추진할 것이냐로 논의가 분분하다.
이를 추진하기로 수뇌부가 3개항의 각서를 써 합의했다는 사실은 이미 5개월 전 본지 특종보도(5월29일자 1면톱)를 통해 그 내용이 소상하게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 보도는 일상적인 방법으로 중앙일보 정치부 정당팀이 관계자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밝힌 대특종이었다.
그 보도가 나가자 한 당사자의 완강한 부인이 있었으나,합의한 사실을 많은 당간부들은 알고 있었다.
그 당사자도 본지가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보도했음을 얼마 후 알게 됐고 알고난 후부터는 답변을 얼버무리거나 언급을 자제했다. 문서관리책임자로 알려졌던 사람들도 보도에 잠시 놀랐을 뿐 그 이상 특별한 대책을 강구하진 않았다.
말하자면 합의각서의 존재와 합의내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민자당의 각 계파는 그같은 「사실」을 근거로 정치적 주장과 파워게임을 틈틈이 벌여왔다.
그래놓고 5개월 후 합의각서의 복사본이 본지(10월25일자 3면)를 통해 공개되자 그것이 밖으로 알려진 경위가 무엇인지에 대해 민자당 내부가 물끓듯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예의 「공작」이니 「음모」니 하는 말이 다시 왔다갔다 하고 있다. 취재과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하는 판이다.
우리 정치판의 수준이나 몇몇 정치지도자들의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말들이 악습의 자기변명이거나 본질의 어려움을 호도하려는 정치술수라는 것쯤은 이제 알 만큼 알고 있다. 그 이유가 자명하기 때문이다.
개헌을 한다면 그것은 최종적으로 국민이 하는 것이다. 몇 사람이,혹은 어느 정당이 하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몇 사람이 추진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는 것도 이상하고 비밀이 깨진 것을 온국민을 상대로 시빗거리로 삼는 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의 정확한 보도를 「공작」 운운하며 원망하는 것은 저급의 「네 탓」병이라고 치사.
그러나 냉정히 따져보면 합의한 것을 그대로 확인하느냐,합의를 뒤집느냐,또는 합의를 뒤집을 만한 사정변경이 있으냐 없느냐 하는 것은 민자당이 논의할 문제다. 사리가 이러할진대 개헌이란 본질문제를 떠나 각서가 공개된 과정만을 문제삼아 민자당이 온통 북새통을 떨고 있는 것은 국민 보기에 부끄러운 노릇일 뿐 아니라 민자당이 구조적으로 어딘가 깊게 병들어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이렇듯 원칙도 기강도 없이 저차원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발언과 비논리적 책임전가가 계속된다면 필시 우리 정치는 점덤 더 국민의 버림을 받을 것이고 정치지도자들의 신용타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론 우리 정치인들에겐 「공작」을 당하고 탄압을 받던 어두운 기억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만 해도 안보사의 민간인 사찰이란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이런 환경적 요인들이 정치인들로 하여금 때로는 진실을,때로는 터무니없는 덮어씌우기 낭설을 퍼뜨려 자신이 핍박받았음을 선전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는 생리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또 바뀌고 있다. 국제정치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우리 국민의 말하고,듣고,보는 환경도 이 몇 년 새 엄청나게 달라졌다.
장악하고 감추는 정치권력의 힘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정치인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
이같은 새 흐름을 정치가 앞장서 이끌지는 못할지언정 얼토당토않은 구습으로 자신의 궁지를 모면하려 국민을 속이는 것은 「비겁」을 넘어 「죄」를 짓는 일임을 명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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