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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번의 배신에도 모국 용서했다, 덴마크서 온 그의 다짐

중앙일보

입력

“날벼락 같았죠. 철석같이 믿었는데…”
지난 18일 서툰 한국어로 한국생활을 얘기하던 덴마크 국적 여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난생처음 경찰서에 간 순간을 떠올리면서다. 그는 지난해 여름 고소인 신분으로 한국 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지인의 권유로 가입한 보험계약이 화근이었다. 입금한 돈을 모두 잃고 나서야 자신이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덴마크에서 자란 그는 낯선 수사기관에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는 동안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30년 만에 돌아온 모국에서 다시 상처를 입은 전직 덴마크 태권도 국가대표 한분영(48)씨 얘기다.

생후 3개월 만에 입양길 오른 아이 

한분영씨에 대한 출생 기록은 1974년 그가 해외 입양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보육원에 남은 원아대장이 유일하다. 사진 한분영씨 제공

한분영씨에 대한 출생 기록은 1974년 그가 해외 입양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보육원에 남은 원아대장이 유일하다. 사진 한분영씨 제공

48년 전 가을 한씨는 모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인천 남구청에 맡겨졌다. ‘한분영’이란 이름과 ‘건강상태 허약’이란 짤막한 메모가 그에 대한 유일한 정보였다. 친부모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서 갓 태어난 여아는 해외 입양길에 올라야 했다. 생후 3개월 만에 모국을 떠나 덴마크 홀스트브로에 사는 부부에게 입양됐다.

다행히 이국의 새 부모는 아이를 성심껏 돌봤다고 한다. 낯선 곳에 녹아들 수 있게 키우면서도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도왔다. 운동신경이 탁월했던 아이가 서울 올림픽을 본 뒤 태권도 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물심양면 지원하기도 했다. 든든한 양부모 덕에 한씨는 덴마크 국가대표로 태권도 유럽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며 이름을 날렸다. 태권도 덕에 사진으로만 보던 한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한분영씨는 199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유럽 태권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했다. 사진 한분영씨 제공

한분영씨는 199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유럽 태권도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했다. 사진 한분영씨 제공

간간이 찾던 모국에 터를 잡은 건 도복을 벗기로 결심하면서다. 선수로서 원 없이 활동했으니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발차기를 해보고 싶었다. 친부모는 찾지 못했지만 어릴 적 떠나온 모국이 자꾸 눈에 아른거렸다. 2000년 무작정 한국행을 택했다. 연세대 어학당을 거쳐 시작한 사회복지학 전공은 생각보다 그와 잘 맞았다고 한다. 맘에 들지 않았던 덴마크 이름 대신 ‘꽃가루가 날린다’는 의미의 한분영이란 이름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대학원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한국외대에서 7년간 덴마크어를 강의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머니의 나라에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아픔 나누러 나간 모임에서 비롯된 사기 

한분영씨는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은 지난 15일 한씨가 스승의 날 행사에서 자기 소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한분영씨는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은 지난 15일 한씨가 스승의 날 행사에서 자기 소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본인제공

한씨는 평소 입양인 커뮤니티 모임을 종종 찾았다고 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아픔을 나눴다. 우연히 커뮤니티 소속 지인의 소개로 A씨를 알게 됐다. 그는 한씨 등에게 자신이 다니는 B 보험회사의 금융상품을 소개했다. 수익성이 높고 원금손실이 없다며 투자를 권유했고 한씨는 흔쾌히 응했다. 그러나 1년 뒤 만기일이 다가오자 B사는 계약을 연장하게 한 뒤 새 상품을 제시했다.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고 한씨는 그 약속을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원금과 이자가 들어오지 않았고 B사는 연락이 두절됐다. 그렇게 한씨의 피땀 흘려 모은 돈은 증발했다.

변호사의 도움으로 고소장을 써냈고 수사가 시작됐다. 조사결과 B사는 투자자들을 끌어모은 뒤 투자금을 돌려막기를 하는 수법으로 수익을 챙기는 ‘다단계 금융사기’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B사 대표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모두 인정했지만 A씨는 “대표 지시에 따랐다”며 혐의를 부인했다고 한다. 경찰은 지난 2월 B사 대표를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송치했다. 보험사 대표가 한국 물정에 서툰 한씨를 노리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다만 A씨는 B사 대표와 공모했다는 정황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보고 보험업 위반 혐의만 적용했다.

“아프지만 실망하지 않겠다”

한분영씨는 두번이나 그를 버렸지만 모국에 실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한분영씨는 두번이나 그를 버렸지만 모국에 실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진 본인제공

두 번이나 그를 버렸지만 한씨는 어머니의 나라에 실망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이번 일이 입양인을 상대로 한 범죄에 경종을 울리길 바란다고 했다. 최근 서울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자신의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했다. “해외로 입양됐던 이들이 가족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들을 도울 방안을 찾고 싶어요. 기회가 되면 해외입양 역사도 기록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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