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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대장님 바위 까주세요"…닥터링과 꼼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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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호 31면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닥터링(doctoring)이란 단어는 생소합니다. 의사를 뜻하는 명사와 달리 닥터는 동사로 쓰면 ‘조작하다’ ‘거세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는 사뭇 다른 길로 가는군요.

이 ‘닥터링’을 종종 쓰는 분야가 있습니다. 우선 야구입니다. 투수가 야구공에 침 또는 이물질을 바르거나 표면을 거칠게 해서 던질 때를 말합니다. 공의 변화가 예측 불가가 됩니다. 타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어 메이저리그(MLB)에서 금지됐습니다.

닥터링은 등산에서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치핑(chipping)으로 쓰기도 합니다. 바위에 드릴이나 정·망치로 작은 흠을 냅니다. 가로·세로, 네모·동그라미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걸 살짝 잡거나 디뎌서 등반하는 것이죠. 닥터링은 있는 그대로의 바위에 손상을 가하면서까지 제 한 몸 쉽게 가려고 하는 속임수로 치부됩니다.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은 『등산상식사전』에 ‘사도(邪道)’로 표현합니다.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사진 이명희]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사진 이명희]

지난 3월 중순 클라이밍의 성지로 부르는 경기도 용인 조비산 바위가 훼손됐습니다. 최상급자 루트입니다. 클라이머들은 ‘누군가, 자신이 어차피 등반을 못 할 정도로 어려우니, 남들도 못 하게 결정적인 곳을 손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확증은 없습니다. 다만 그 닥터링으로 인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간 그 루트에 정성을 쏟은 클라이머들이 낙담하고 있습니다. 닥터링은 이렇게 타인의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조비산뿐이 아닙니다. 닥터링은 북한산 인수봉·수리봉, 도봉산 선인봉, 설악산, 선운산 등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데크를 등산로에 깔고 쇠 난간을 미끄러운 암벽에 박는 것도, 암벽 등반을 위해 볼트를 설치하는 것도 모두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자연을 빌리는 것이기에 최소한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닥터링은 다릅니다. 최석문(49·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클라이머는 “닥터링은 자연과 모험성, 등반 가치를 훼손하는 행동이자, 미래 세대의 (닥터링 없이도 등반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침해”라고 합니다. 야구와 마찬가지로 바위 닥터링은 치팅(cheating)과 동격화 됩니다. 꼼수입니다. “대장님, 못 올라가겠어요. 바위 까 주세요”라는 말에, 그 대장은 망설임 없이 ‘바위를 까는’ 걸 한 클라이머가 목격했다고도 합니다.

수도권의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왼쪽에는 등반 중 추락에 대비하기 위해 볼트가 설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수도권의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왼쪽에는 등반 중 추락에 대비하기 위해 볼트가 설치돼 있다. 김홍준 기자

왜 이럴까요. 꼼수임에도 묘수라고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몰입이 지나쳐 타인도, 훗날도 생각하지 않는 매몰에 빠진 점도 있습니다. 내로남불의 자기 합리화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닥터링뿐일까요. 산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나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짐승이 먹으라고,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이죠. 한 심리상담사가 말합니다. “꼼수는 타인이 그걸 금세 잊어버린다는 전제하에 벌어진다”고요. 최근 국회에서도, 국무회의에서도 꼼수가 벌어졌습니다. 새 정부 인사청문회에서도 각종 꼼수가 드러났습니다.

수도권의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김홍준 기자

수도권의 한 암벽 등반지에 닥터링된 바위. 김홍준 기자

설악산 장군봉에 닥터링을 했던 한 클라이머는 죄책감에 자신이 낸 루트를 폐쇄했습니다. 제시카 트레이시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와 준 프라이스 탱니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자기 합리화와 달리 죄책감은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죄책감에 닥터링이 꼼수임을, 잘못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천명한 이 클라이머 같은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체에 말이죠. 그래야 꼼수를 묘수로 착각하는 악수는 사라질 것입니다. 새 정부에 대해 이런 기대 한 가닥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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