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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간 중범죄 빈발, 나쁜 징조 초기에 악연 끊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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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호 28면

러브에이징

지구촌 인구 80억 시대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셈이다. 불교에서는 낯선 사람끼리 소매를 스치는 사소한 만남도 전생에 인연이 있어야 한다는 타생지연(他生之緣)을 강조한다. ‘모든 것은 인(因, 직접적인 힘)과 연(緣, 간접적인 힘)이 합해져서 생겨나고,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석가모니의 인연설과 맞닿아 있다. 쌀을 수확하기 위해 뿌리는 볍씨는 인, 토양이나 날씨는 연에 해당한다.

물론 세상일에는 논리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나 초현실적인 상황도 적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난해한 상황이 닥치면 인류는 운명, 팔자, 신의 뜻, 전생의 업보 등 다양한 해석을 동원해 인간적 한계를 설정한다. 일단 초월적인 힘이 작동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면 대부분 순명(順命)을 인간의 도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인연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특히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일수록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조건 없이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믿음을 갖기 쉽다. 과연 그럴까.

미 여성 30%, 남성 10% ‘매 맞는 증후군’

물론 인연 중에는 귀하고 좋은 선연(善緣)이 있다. 하지만 철천지원수로 표현되는 악연(惡緣)도 존재한다. 불편한 진실은 심각한 중범죄는 낯선 타인보다 불가분의 친밀한 인연을 맺은 사이에서 발생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 간에 피해나 악영향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0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중 66.4%가 가족이나 친척 등 아는 사람이다. 대검찰청의 2020년 살인 사건 분석 결과도 면식범이 56.4%(친족 24.3%,이웃/지인 16.3%, 애인 7.5%, 친구/동료 7.5% 등)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라는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도 형제간에 발생했고,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악연이 뿌리내리는 걸 막으려면 나쁜 징조를 보이는 초기부터 단호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천의 얼굴을 가진 가해자의 진면목을 알기도 어렵고, 피해자 유형도 특정할 수가 없다. 실제 연령, 사회계층, 교육 수준, 경제 수준, 문화적 배경, 인종 등을 불문하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학대의 심각성은 1979년 미국의 심리학자 르노 워커가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을 ‘매 맞는 아내 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으로 부르면서 부각됐다. 장기간 학대를 받은 아내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불안·우울·수면장애·공황발작·감정 폭발 등의 증상을 보인다.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발생한 학대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시점부터 지속되기 마련이다. 가해자-피해자 사이에 긴장 축적(1단계), 학대 발생(2단계), 화해(3단계)에 이르는 악순환의 고리가 비교적 쉽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물론 피해자는 아내뿐 아니라 남편, 연인, 동거 가족 등 인연이 깊다고 생각되는 관계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다. 최근 정신의학계에서는 ‘매 맞는 사람 증후군’으로 진단하며〈표 참조〉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의 아류로 보기도 한다. 환자 발생률은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한 미국에서도 여성 30%, 남성 10%일 정도로 흔하다.

환자 치료의 걸림돌 중 하나는 피해자가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피해자들은 자신이 학대받을 짓을 했다며 자신을 비하한다. “거짓말도 100번 하면 진실이 된다”는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의 주장처럼 가해자로부터 욕이나 모욕을 끊임없이 듣는 과정에서 세뇌가 된 셈이다. 가해자에게 애정을 보이는 피해자도 흔하며, 학대받는 상황은 싫어하면서도 가해자와 관계가 단절되는 건 꺼리는 모순적인 태도도 나타난다.

최근 명문대 졸업 후 대기업에 15년 이상 근무한 남성이 중학생 때부터 조건만남·절도 등 범죄 행위를 일삼은 11세 연하 아내에게 지속해서 심각한 피해를 입다가 사망한 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검찰은 피의자가 남편의 일상을 통제하고 가족과 친구로부터 고립시켜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오랜 기간 착취했으며 보험금을 노리고 다이빙까지 강요했다고 판단해 살인죄를 적용했다. 부부의 인연이 타인(남편)에 대한 심리적 지배를 쉽게 만들어 악연으로 끝난 사건이다.

진정한 인연과 스쳐 가는 인연 구분해야

일단 악연이 형성되면 피해자 자력으로 관계를 단절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피해가 의심될 땐 주변에서 도움을 줘야 한다. 이때 가해자 비난과 피해자 예단은 삼가야 한다. 대신 피해자는 잘못이 없으며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이후 심리치료, 약물치료, 집단 치료 등으로 피해자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인연의 엄중함은 무소유의 가르침을 설법한 법정스님의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는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님은 진정한 인연과 스쳐 가는 인연을 구분해야 하며,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 투자해야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강조한다. 또 인연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진실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대가로 받는 벌이라며 준엄하게 경고한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 등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인연에 대한 법정 스님의 조언을 가슴속에 새겨 두고 실행에 옮겨야 할 것 같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다수의 칼럼을 연재했다.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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