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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켓 사재기, 골라 잡는 택시 앱…정직한 시민들만 골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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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호 06면

시장 교란하는 ‘매크로’

지난달 18일 자정쯤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시민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늦은 술자리가 늘고 있는 가운데 일부 택시 기사들이 사용하는 ‘매크로’ 프로그램 탓에 일반인들이 택시 호출을 하지 못해 피해를 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8일 자정쯤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시민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거리두기가 해제되어 늦은 술자리가 늘고 있는 가운데 일부 택시 기사들이 사용하는 ‘매크로’ 프로그램 탓에 일반인들이 택시 호출을 하지 못해 피해를 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는 대학원생 김준혁(30세)씨는 최근에 부모님을 위해 임영웅 콘서트를 예매하다가 깜짝 놀랐다. 김씨는 “오후 8시에 오픈이라기에 저녁도 일찍 먹고 PC방에서 기다렸는데 50분 뒤에야 예매 창이 열렸다”며 “예매에 실패한 뒤 혹시나 해서 중고나라, 티켓베이 등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13만원대 티켓이 30만원대에 팔리고 있더라”고 전했다.

# 프로야구 구단 롯데의 오래된 팬인 회사원 이도연(28세)씨는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가 완화됐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야구경기를 보러 가기로 했다. 가격이 비싸더라도 좋은 좌석을 구하자는 생각에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지만 이미 모두 팔린 뒤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중고거래 앱에 들어간 이씨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야구 예매 티켓 판매 글에 놀랐다. 이씨는 “판매자 한 명이 연속된 자리의 티켓을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전에도 티켓을 판매한 이력이 있어서 매크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업계 “제재 땐 공연 직전 단체 취소 우려”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며 공연장이나 스포츠 경기장을 찾는 시민이 늘고 있다. 그만큼 좋은 시간이나 인기 배우가 나오는 공연 티켓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매크로를 통해 다수의 티켓을 예매한 뒤 높은 웃돈을 붙여 되파는 ‘플미(프리미엄)’ 거래도 함께 늘고 있다. 이용자들은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원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플미 티켓’을 구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인들의 예매가 쉽지 않은 이유는 단시간에 예매가 몰리는 문제도 있지만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업자들 탓이 크다. 이전에는 표를 구했던 개인이 부득이하게 공연장을 찾지 못할 경우 ‘양도’ 방식으로 정가 또는 오히려 싼 가격에 예매 티켓을 재판매했다면, 지금은 매크로 프로그램을 통해 티켓을 대량으로 예매한 뒤 이를 되파는 식의 ‘작업’이 이뤄진다.

매크로는 특정 명령을 반복 입력하는 자동 프로그램이다. 공연 일시부터 좌석, 결제 방식까지 각 단계에 필요한 정보를 여러 인터넷주소(IP)로 한 번에 자동 처리해 입력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다. 성공할 때까지 초당 수차례에서 수십차례까지 같은 명령을 반복하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조작하는 일반 예매자보다 성공 확률이 높다. 서버를 직접 건드리거나 오가는 데이터를 가로채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해킹으로 처벌하기도 어렵다. 지나치게 짧은 시간 동안 같은 IP에서 반복적으로 구매 요청이 들어올 경우 사람이 아닌 매크로로 판단해 판매자가 차단할 수 있지만, IP를 바꾸는 식으로 작동하는 매크로까지 잡아내기는 쉽지 않다. 결국 업자들이 대량으로 예매한 티켓은 중고거래 사이트 등을 통해 비싸게 유통된다.

매크로는 티켓 예매뿐만 아니라 잔여 백신, 택시 호출 등에도 사용된다. 직장인 황인철(32세)씨는 지난 금요일 회식을 마친 뒤 마포구 대흥동 집으로 가기 위해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지만 40분 넘게 ‘호출 가능한 택시가 없습니다’라는 안내만 반복됐다. 황씨는 “지나가는 택시들은 다 ‘예약’ 불빛이 들어와 있는데 계속 택시가 없다고 뜨니 황당했다”며 “10㎞ 내외의 단거리라서 택시가 안 잡힌 것 같다”고 말했다. 택시 기사들이 소위 ‘지지기’로 불리는 매크로 앱을 활용해 입맛에 맞는 승객을 골라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지지기 같은 매크로 앱은 카카오T 앱에서 특정 목적지나 원하는 거리의 콜을 자동으로 잡아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택시 앱은 근처 기사에게 동시에 콜이 뜨면 선착순으로 배정받는 식으로 작동하는데 매크로 앱은 단거리나 특정 목적지의 콜을 원천 차단해 원하는 콜만 누를 수 있도록 해 준다. 상대적으로 이용료가 비싼 매크로 앱을 이용하면 선호 지역을 골라잡을 수도 있다. 한 매크로 앱은 가입비만 50만원에 호출 골라잡기 방식에 따라 월 이용료 6만~10만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택시기사 이모(46)씨는 “앱을 사용하면 수입이 월 10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며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호출을 잡을 수 있어서 퇴근하기도 용이하다”고 말했다.

카카오T 블루 가맹 택시를 운전하는 정모(51세)씨는 “정직하게 일하는 기사들과 시민들만 바보가 되는 셈”이라며 “카카오에서 매크로 앱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문제는 공연 티켓과 마찬가지로 원천 봉쇄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카카오T를 관리하는 카카오모빌리티는 실시간 모니터링으로 매크로 앱 사용을 규제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후 규제만 가능할 뿐 사전에 차단하기는 쉽지 않다. 사기업이 매크로 차단 앱을 깔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개인 소유 스마트폰의 정보를 캐내는 해킹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 카카오모빌리티 관계자는 “매크로 앱 자체가 불법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불편을 야기한 업자들에 대해 법적 대응을 진행 중”이라며 “기사분들에게도 사전경고, 배차 제한, 영구 정지 등 3단계에 걸쳐 제한을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매크로를 이용한 시장질서 교란을 제재할 법적인 기준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크로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법 조항도 없어 경찰은 관련 문제가 일어나면 사안마다 다른 혐의를 적용한다. 매크로로 티켓을 대량 구매해서 손해를 끼치면 업무방해죄를 적용하고, 서버 장애를 일으키면 컴퓨터 장애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식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손해를 끼쳤다는 구체적인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어렵다. 공연업계 관계자는 “매크로 프로그램이 업무를 방해했다고 고소를 해도 ‘사이트에 다른 소비자들이 몰려서 그런 거다’라는 식으로 방어하면 피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판매 업체들이 스스로 매크로를 규제해야 하지만 거꾸로 피해를 볼 여지가 있어 이마저도 쉽지 않다. 한 공연업계 관계자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업체에서 직접 제재할 경우 공연 직전 단체로 티켓을 취소하는 등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조심하는 분위기”라며 “경찰에서는 업무방해죄 적용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몇장의 티켓을 구매해야 업무 방해인지 규제 기준이 모호하다”고 말했다.

코딩 등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대한 교육은 확산하는데 제도가 따라가지 못해 매크로가 더욱 성행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직 프로그램 개발자 신모(30)씨는 “컴퓨터 전공을 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도 2~3주만 교육을 받으면 매크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며 “매크로를 만드는 것 자체를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건 개발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신씨도 기업 영업팀에서 골프장 부킹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일주일 정도면 부킹 매크로 프로그램을 하나 짜는데 보수로 50만~100만원을 준다고 하니 개발자 입장에서는 혹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매크로, 불법·편법 경계부터 명확히 해야

규정이 뚜렷하지 않으니 같은 행위를 두고도 판결이 제각각이다. 2018년 매크로 프로그램 제작 및 유통 혐의로 기소된 A씨는 1심에서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2019년 10월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포털사이트 운영에 매크로가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국회에는 매크로 관련 법안들이 계류 중이다. 지난 3월 공연·스포츠경기의 입장권·관람권 등 티켓 구매에 악용되는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공연법과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이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비자의 구매를 방해해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는 매크로 암표의 근절을 위해 개정안에 대한 조속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실의 김진성 비서관은 “현행 제도로 처벌이 불가한 매크로 행위들에 대한 기준을 공론화하는 것이 법안의 목적”이라며 “세부적인 기준들 또한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매크로 프로그램에 대해 불법과 편법의 경계부터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매크로 ‘사용 자체’가 문제인지, 매크로로 ‘많은’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 문제인지, 구한 티켓을 ‘비싸게’ 파는 것이 문제인지부터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사용 자체를 문제 삼기는 어렵다. 매크로는 정보기술(IT) 업계는 물론 일반 기업에서도 널리 쓰는 기술이다. 많은 티켓을 예매하거나 선호하는 승객을 골라 태우는 것을 문제 삼는다면 얼마나 많은 수량을, 어떤 방식으로 고르는 것을 규제하느냐가 문제다. 비싸게 파는 것이 문제라면 모든 중고거래가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매크로의 경우 프로그래밍 등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등 순기능도 있기에 무작정 규제만 하는 것은 오히려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며 “처벌 규정을 개별적으로 세세하게 만들면 또 이를 우회하는 다른 매크로가 등장할 수 있어 처벌한다고 능사는 아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매크로 문제는 정보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미국 등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국제적인 협의를 거쳐서 입법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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