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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생~91년생 한 무대…한국 피아노 족보를 연주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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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피아니스트 이혜전ㆍ강충모(앞줄 왼쪽부터)와 제자들을 포함한 피아니스트 총 48명이 10일 한 무대에 선다. 그 중 20명이 2일 서울 서초동 코스모스홀 피아노 전시장에서 연습을 위해 모였다. 공연은 2중주부터 8중주까지 이어진다. 우상조 기자

피아니스트 이혜전ㆍ강충모(앞줄 왼쪽부터)와 제자들을 포함한 피아니스트 총 48명이 10일 한 무대에 선다. 그 중 20명이 2일 서울 서초동 코스모스홀 피아노 전시장에서 연습을 위해 모였다. 공연은 2중주부터 8중주까지 이어진다. 우상조 기자

1928년생인 피아니스트 정진우 서울대 명예교수는 경성 의학전문학교 출신이다. 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음악을 놓지 않았고 1957년 오스트리아로 피아노를 공부하러 떠났다. 한국인 피아니스트 최초의 오스트리아 유학생이었다.

1942년생인 신수정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진우 교수의 수많은 제자 중 한명이다. 6·25 전쟁 당시 악보를 가지고 피난을 떠났고, 전쟁 중에 흙바닥에서 열렸던 제1회 이화경향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일종의 ‘데뷔’를 했다. 44년생 이경숙 연세대 명예교수(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는 한국 최초로 베토벤·모차르트·프로코피예프 소나타 전곡을 완주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초대 원장을 지냈다.

이제는 세계 음악계에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없으면 이상한 시절이다. 대형 콩쿠르는 물론이고 주요 공연장, 음악학교, 매니지먼트에서 한국 피아니스트들이 맹활약하고 있다. 이런 한국의 피아노 역사를 볼 수 있는 공연이 열린다. 94세와 80세가 된 정진우·신수정, 78세의 이경숙 피아니스트와 고중원 단국대 명예교수, 여기에 최연소로는 1991년생 피아니스트까지 총 48명이 한 무대에 선다. 60여년의 한국 피아노 역사를 돌아본다는 뜻으로 ‘피아노 헤리티지(유산)’라는 제목이 붙었다.

헤리티지 공연

헤리티지 공연

그 중심에는 피아니스트 강충모(62)가 있다. 강충모는 원로 피아니스트들을 사사했고 현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국 피바디 음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줄리아드 음대 교수를 지낸 그의 제자들이 국제무대에서 거둔 성적이 화려하다. 퀸 엘리자베스, 리즈, 더블린, ARD, 롱티보 등 수많은 대회에 입상했다.

이번에 출연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바로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그의 제자들이다. 김규연·김태형·원재연·박종해·손정범·김종윤·허재원 등이 출연한다. 여기에 강충모와 결혼 30주년을 맞은 피아니스트 이혜전(숙명여대 음대 학장)의 제자들도 함께해 모두 48명이 됐다.

“최초 유학파 선생님들을 거쳐 최근의 젊은 연주자까지 둘러보면 한국 피아노 역사의 큰 흐름이 보인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충모는 “커다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우선 스승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에 배움을 전수한 시절을 떠올렸다. “정진우 선생님의 스승인 이애내(1908~96) 선생님이 최초의 독일 유학파였다. 이애내·정진우의 계통으로부터 한국에도 체계적인 서양음악 교육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강충모는 피아노 연주의 발전사에서 ‘연주할 곡목 확대’의 의미가 크다고 봤다. 해외 연주자의 내한은 물론 악보 출판, 음반 발매도 드물었던 시절에는 피아노 작품 목록 전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80년대 즈음부터 음반 보급이 활발해졌고, 연주 곡목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음반을 들으려면 대학 도서관에서 신청해야 했는데, 한번은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을 틀어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생전 들어본 적 없는 곡이 나오는 게 아닌가.” 같은 음반에 들어있는 슈만의 판타지였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가 연주한 버전이었다. 강충모는 “그 밖에도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을 듣다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모음곡을 알게 되는 식으로 우연의 힘까지 빌려 차츰 연주 곡목을 늘려갔다”고 말했다.

이제 한국 피아니스트들에게 미개척지란 별로 없다. 강충모는 “제자들의 연주회 앙코르에 내가 모르는 곡이 나올 정도”라며 “이제는 한국에서 초연할 수 있는 작품 자체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주 곡목뿐 아니라 활동 반경의 확대, 또 기량의 눈부신 발전이 한국 피아노 연주의 역사를 말해준다고 했다. “지금의 어린 피아니스트들은 피아노를 시작할 때부터 세계 무대를 배경으로 상상하지 않나.” 강충모는 “일단 체격 조건이 좋아져 피아노가 한국인이 감당할 수 있는 악기가 됐다. 요즘엔 초등학교 고학년이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쉽게 생각하고 연주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누군가 쇼팽의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1번을 소화할 수 있으면 모여서 구경했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신기할 지경이라고 했다.

강충모가 기획한 이번 공연에는 피아노 독주가 없다. 피아노 8중주로 시작해 2중주, 4중주, 다시 8중주로 이어진다. 강충모는 “늘 혼자서만 연주하던 피아니스트들이 함께하다 보니 공연 연습 시간에 다들 행복해한다”고 소개했다. 출연진 중 최연소인 피아니스트 이승연(31)은 “이렇게 황홀하면서 떨리는 공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공연은 10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와 교향곡 5번 4악장, 라벨 볼레로를 비롯해 거슈인, 구노, 스메타나 작품의 피아노 앙상블 편곡 버전을 들을 수 있다. 강충모는 “정진우 선생님은 고령으로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고 깜짝 등장하신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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